오래 전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너무 떨리는 마음에 심장이 금방 멎는 것만 같았습니다.   머리 속에 커다란 종기가 자라고 있다니 그것도 얼마 못가 뇌를 쳐서 생각의 끈이 끊어지고 망각상태가 될지도 모르고 그러다가 죽게 된다니.  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그 자리가 어떤 중요한 모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바짝 붙어앉은 그녀의 얼굴만 쳐다 보았습니다.

그녀는 믿을 수 없을만큼 담담해보였습니다.  오히려 내가 더 걱정스러워 연발 “어쩌면 좋아”하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습니다.  그녀는 시집을 발표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시인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애를 시로 남기고 싶고 마지막 정열을 다 바쳐 한 권의 시집을 내고 싶다고 해 내 눈엔 금새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 고백 이후 그녀는 직접 쓴 시를 하루가 멀다하고 내게 팩스로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그 끝머리엔 언제나 자신이 살아야 할 힘을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고맙다고 그리고 정말 사랑한다고…  무슨 연애편지도 아닌데 이렇듯 시와 편지를 보내니 나도 덩달아 마음이 들뜨는 듯 했습니다.

더구나 내가 직접 찍은 사진들로 엮은 시집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난 베라자노 브릿지를 찍기도 하고, 페리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도 찍고, 맨해튼 정경을 담기도 하고, 로우 맨해튼의 공원들을 헤메며 여러 장의 흙백사진들을 찍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이라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퍽 심각했었는데 그녀에게서 차츰 신뢰할 수 없는 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기분이 묘해진 나는 그냥 관망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모임에선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였던 그 남자는 보기에도 아름다운 아내와 멋진 자녀들을 둔 완벽한 가장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집도 아름답게 꾸몄고 특히 그녀의 요리솜씨는 수준급 이상이어서 모두들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그 남자는 어릴 적에는 문학을 꿈꾸었던 소년이었고 나이가 든 후에도 여전히 글을 써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와 모임에서 우연히 알게되면서 자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그 후에 둘 사이의 상황이 아주 심각하게 되었는지 모두들 숙덕거렸습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그녀에게서 별다른 병의 진전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나 그녀는 계속되는 남편과의 불화로 아이들 문제로 미루다 결국 이혼하게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남자와 동거한다는 소문이 떠돌면서 그 남자의 가정도 깨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그녀의 자녀들까지 거들어야 됐다고 했습니다.

인생 후반기의 이혼은 용감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데 외모나 음식솜씨나 인품에서도 자신의 아내와 비교도 안되는 여자인 그녀가 얼마나 홀렸으면 그럴 지경이 되었겠느냐는 이야기도 흘러나왔습니다.  그녀 자신의 말로 표현하자면 자신은 무당이 될 팔자라고 했다는데 내가 보아도 좀 드세게 보였고 그 남자의 부인은 우아한 귀부인 타입이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녀는 마지막 카드를 불쑥 내밀면서 벼랑 끝에 밀어붙여놓고 당황스럽고 대책없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휘어잡는 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누가 곧 머지않아 죽음이 확실하다는 사람 앞에 단단히 무장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내게 했듯이 그 남자가 주인공이 된 시와 편지를 계속 보내면서 바짝 달라붙어 죽도록 사랑한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고백한다면…  아니 그 절반만 해주어도 그대로 넘어가버릴 것입니다.

결국 그 연민의 정이 정신적 결합으로 이어져 아내는 물론이고 다 장성한 자식들이나 친척들의 호소도 소용 없었고 남들의 눈도 아랑곳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졸지에 늦으막히 이혼을 당한 그녀는 처음에는 거의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눈물로 지샜는데 오랜 친구들의 도움으로 차츰 외출도 하고 모임에도 참석하면서 많이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와 곧 죽을 것이라던 그녀는 같이 살면서 차츰 둘 사이에 문제가 일어나 나중엔 불화까지 생겼다는 말을 듣고 더 이상 그들의 소식은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냄비는 일찍 끓고 식게 마련이고, 만나나 헤어지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얼마 전 그 남자의 전처를 샤핑몰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 앞에 서 있는 그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나보다 위인 그녀의 손을 잡고 “그 새 안녕하셨어요?”하며 얼마나 힘들었는지 다 알고 있었다는 무언의 말을 건네며 손을 꼬옥 쥐었습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너무 편해요.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요.  없으니까 오히려 더 편해요.  이젠 같이 살자고 해도 못 살 것 같아요.”

내게 자신의 명함을 불쑥 내밀고 꼭 다시 만나자며 돌아서서 당당히 걸어가는 그녀의 뒷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윤명희
2011-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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