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를 무척 좋아한 나머지 자신의 본분까지 망각한 목사를 보다 못해 천사들이 하느님께 아뢰었다. “저대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혼을 내서 정신을 차리게 해야지요.” 천사들은 이젠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일제히 한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셨다. “혼을 내도록 하지.” 며칠이 지나고 주일날, 목사는 예배를 끝내기가 무섭게 필드로 나갔다. 그런데 목사가 기뻐 날뛰는 일이 일어났다. 첫 스윙에 홀인원을 한 것이었다.

목사의 허리나 다리가 부러지는 일이라도 벌어질 줄 알았는데 홀인원이라니, 천사들은 기가 막혔다. “너무하시는 거 아닌가요? 주일날 골프 치는 목사에게 홀인원을 허락하시다니…. 혼내시겠다는 약속은 뭔가요?” “그게 벌이다.” “홀인원이 벌이라고요?” 하느님께서 빙그레 웃으셨다.

“목사는 지금 홀인원으로 매우 기쁘지만 그걸 자랑할 수 없다. 목사가 주일날 골프 쳤다는 것을 어디 가서 말하겠느냐? 자랑하고 싶어 죽겠는데 자랑할 수 없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겠냐? 그것이 바로 벌이다.”

지인에게서 들은 얘기다. 극적으로 지어낸 우화겠지만, 자랑이야말로 사람의 본능임을 일깨워준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자랑은 썩 내켜 듣지 않으려 한다. 젊은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자랑질’이란다. 같은 세대에서는 물론이고, 특히 나이 든 세대의 자기 자랑을 아주 거슬려 한단다. 어떤 단어 뒤에 낮잡는 뜻으로 붙는 것이 ‘질’이고 보면 갑질, 손가락질처럼 영 못마땅하다는 의미에서 자랑질이다. 그럼에도 자기는 물론이고 일가족에 대한 노골적인 자랑, 은근슬쩍 자랑이 실제 만남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넘쳐난다.
자랑의 질주

얼마 전 체력단련 강좌에서였다. 늘 내 옆자리가 위치인 분이 “아구 배불러, 아구 배불러”를 연발했다. 운동 전에는 배부를 정도로 먹지 않는 게 보통인데, 오늘은 웬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곧 강좌가 시작되기에 모른 척했다. 그랬더니 또다시 “아구 배불러, 아구 배불러”가 들려왔다. “오늘 뭘 그리 맛있는 걸 많이 드셨기에 그러세요?”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 아들이 전역한 지 달포쯤 됐는데 좀 쉬고 복학하래도 그예 아르바이트를 하더니 오늘 월급 받았다고 크게 한턱을 냈지 뭐야. 어디 어디 뷔페인데….”
내 질문과 동시에 쏟아진 그분의 아들 자랑은 강좌가 시작되고서도 소곤소곤 그치질 못했다. 강사의 시선이 꽂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잦아들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아들 하나 바라보며 산다는 예순 중반의 분인데, 아들이 얼마나 대견하면 저럴까. 최근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연구로는 노골적인 자랑이나 불평불만보다 은근한 자랑을 사람들은 가장 싫어하는 거로 꼽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구 배불러, 아구 배불러”란 끄나풀을 내가 잡자마자 속사포처럼 자랑을 쏘아댄 아줌마는 귀엽게까지 느껴졌다.

그런가 하면 며칠 전 일흔 가까운 한 지인이 대놓고 계속한 자랑에는 숨이 다 막혔다. 당신이 여러 사람과 찍은 한 다발의 사진을 한 장씩 내보이면서 자랑은 시작됐다. “이것 봐, 내 손이 얼마나 예뻐!”, “내가 그중 제일 맞춤한 치마 길이로 입었잖아. 이날 가장 멋있어 보였대”, “내 나이에 나처럼 날씬하니 뽀대가 나는 사람도 없지?”, “책보다 나한테 배우는 게 더 많다고들 말해”….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전에 약속을 핑계로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덕분에 약속장소에 너무 일찍 도착해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근처에 대나무 숲이 있었으면 좋을 뻔했다. 거기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사람처럼 나도 “끝없는 자기 자랑은 공해!”라고 외치고 싶었다. 마음이 허해서, 내 ‘팬’과 ‘편’이 필요해서 그러려니 하거나, 때론 그저 경로사상에서 장단도 맞춰주며 자랑을 편하게 받아주는 쪽이 잘못인 걸까. 알아서 적당히 하면 좋으련만, 자랑의 질주를 마음 다치지 않고 멈추게 하기란 쉽지가 않다. 사실 어느 정도 자랑은 자존감의 발로이자 자기를 알리는 방편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구나 대화 중 언뜻언뜻 자랑을 비출 때가 잦을 수 있다.
‘흙’에서 유래된 ‘겸손’

하지만 자랑이 소유물이나 외양에만 치우치고, ‘모든 길은 로마로’처럼 ‘모든 얘기는 내 자랑으로’ 귀결된다면 요새 젊은이들 용어로 이른바 ‘깔때기’가 아닐 수 없다. 위는 넓고 밑은 아주 좁아 곧바로 한데 모이는 모양새가 절로 떠오르게 되는 단어다. 젊은이들이 우리말을 오염시킨다는 걱정이 있지만, 이렇듯 스리슬쩍 거슬리는 행태를 비꼬아대는 재치가 반짝이기도 한다. 그런데 깔때기로도 표현이 부족할 때는 어쩌나. 나이 들어 기억력이 흐릿해지면서 했던 자랑 또 하고 또 하는 경우엔 과연 어떤 단어로 짚어 낼 수 있으려나.

하기야 SNS에선 깔때기니 뭐니 신경 쓸 필요조차 없다. ‘카톡방’이나 ‘밴드’에는 모임 구성원들 간 소통보다 자기 자랑을 일삼는 이들이 있기 일쑤다. 그런가 하면 자랑 끝에 결국 “날 잡아가슈”하고 수갑에 손을 들이민 꼴이 되고 마는 경우들까지 심심찮게 보도된다. 영국에선 마약 거래로 큰돈을 번 남자가 돈다발 속에 있는 모습을 트위터에 올렸다가, 프랑스의 보석털이범과 미국의 은행 강도들은 페이스북에서 호화판 생활을 자랑하다가, 국내서도 한 폭력조직이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단체 사진을 올렸다가 체포됐다니 말이다.

자랑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입과 손이나, 그게 닭살인 눈과 귀나 때로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받게 되는 것 같다. 다 자기를 쉽게 내려놓지 못해서이리라. ‘겸손’이 왜 인간의 가장 큰 덕목이라는지, 왜 라틴어 ‘흙’에서 유래된 단어라는지 알 듯하다. 성경에도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 나와 있지만, 특히 흙에 가까워져 가는 나이가 될수록 자랑을 접고 겸손해지란 뜻은 아닐까. 나는 과연 그러한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누누이 자랑하지 않아도 국화꽃처럼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는 노년이기를 일렁이는 가을바람에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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