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딸이 하버드 대학교를 입학할 때부터 룸메이트였던 에이런은 졸업할 때까지 4년간 줄곧 가깝게 붙어다닌 단짝이었습니다.  간혹 우리가 학교를 방문할 때면 그녀는 언제나 상냥하게 인사하고는 딸을 가리키며 좋은 친구가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면서 활짝 웃곤 했습니다.

어느덧 대학교 졸업할 때가 되어 졸업식 참석차 에이런 부모들도 왔고 우리 부부도 함께 만났습니다.  에이런은 무남독녀였고 그녀의 부모는 이혼한 사이였으며 서로 결혼한 새로운 배우자들과 함께 왔으나 졸업식 만큼은 에이런 친부모들만 참석하였습니다.  그런 모습이 한국인인 우리들에겐 이색적으로 보였습니다.

에이런은 텐네시 리틀락에서 자랐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의사이고 특히 클린턴 대통령 가족 주치의였기 때문에 클린턴을 오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에서 지낼 때 일 년에 두 번 에이런의 온 가족이 초청되어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큰딸은 자주 에이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둘이 비밀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고 지금도 무슨 일만 있으면 제일 먼저 달려와주는 절친한 친구입니다.  에이런의 많은 친척들 중 이혼하지 않은 사람은 딱 한 사람 삼춘 뿐이라고 합니다.  이혼하고도 또 이혼하고 해서 몇 번 결혼한 사람들도 많아 결혼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 같다며 에이런 자신도 결혼하기가 무섭다고 했습니다.

대학졸업 후 큰딸은 바로 하버드 법대에 진학했고 에이런은 다른 주에 내려가 평범한 일을 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다 사진관을 하는 고등학교만 나온 아주 평범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워낙 순수하고 착한 이 남자에게 에이런은 푹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큰딸에게 이 남자와는 결혼할 수 있겠다는 연락을 해왔고 큰딸은 이 사실을 내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여자가 고등학교 졸업한 남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이런의 깊은 상실감과 상처를 그가 따뜻한 마음으로 치유해주었으면 했습니다.

우리들의 예상대로 둘은 결혼하여 너무 아름다운 가정을 꾸려갔습니다.  에이런의 남편은 대학에 등록하였고 에이런은 어느 법대에 진학해 둘이 열심히 일하면서 공부도 하여 졸업한 후 둘 다 괜찮은 직장을 가지게 되었고 둘 사이에 올망졸망한 세 딸들도 생겼습니다.  나의 큰딸이 늦게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즉시 워싱턴 DC에서 맨발로 달려와 축하해줄 정도로 그녀는 멋진 친구입니다.

그저께 큰딸이 직장에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엄마’ 하는 음성이 핸드폰에 울리는데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럴 때면 ‘엄마, 나 괜찮아.  아무 것도 아니야.  나 지금 몸이 좀 아파’ 라던지 ‘엄마, 놀라지 마.  아무 것도 아니야’ 라고 말하던 딸이 막 울면서 ‘엄마, 에이런 어떻해?  그 남편이 어제 밤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연락이 왔어.  남편이 얼마나 착했는데….’

공교롭게도 지난 주말 큰딸이 남편과 딸 에이다를 데리고 에이런 집에 놀러갔다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막 돌아왔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지.  결국 헤어진 지 이틀 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밤에 졸면서 운전하던 트럭 운전사가 옆에 가던 차를 부딪치면서 이런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어제는 뉴스에도 나왔다며 큰딸이 먼저 장례식에 가야하니 맨해튼 집에 밤에만 잠시 있어달라고 했습니다.

나도 할 말을 잃고 어떻하면 좋으냐며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둘이서 키우기도 힘든 그 어린 세 딸들을 남겨두고 떠나면 어떻하냐고 에이런이 막 몸부림친다는 이야길 듣고 나도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에이런 남편도 외동아들이고 그의 아주 늙으신 부모님들이 버지니아에 사셔서 리틀락으로 이사하면 에이런 친척들이 많이 살아 아이들 키우기가 훨씬 수월해 그곳에 가고 싶었지만 남편의 연로한 부모와 너무 멀리 떨어져 살 수 없어 중간 지점인 위싱턴 DC에서 살고 있던 것입니다.

나의 둘째 딸도 큰딸과 일 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에이런과도 같이 친하게 지내서 전화에다 대고 불쌍해서 어떻하냐고 엉엉 울고 나도 같이 울었습니다.  그 조그만 아이들이 아빠를 찾을텐데 어쩌면 좋으냐고…

이럴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사는 게 아무 것도 아니란다.  오늘 호흡하다 내일이면 끊어질 수 있는 게 인생이란다.  그러니 너희들은 보이지 않는 영혼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육신을 벗으면 영혼의 세계가 기다리는 데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영혼이 잘되면 지금 죽어도 불행하지 않단다.’   두 딸들은 전화 속에서 슬픈 목소리로 ‘응, 응’ 하며 기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시편 146:4)
윤명희
201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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