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목사의 아침묵상을 읽으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가 직접 영화를 본 것은 아니지만, 한국신문에서 영화 도가니에 대한 기사를 여러 번 접했고, 그 영화로 인하여 한국 전체가 충격을 받아서 뒤늦게 나마 각계 각층에서 문제해결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는 글을 읽고 대충 알고 있던 터였습니다.
김진홍 목사의 글은 또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여러 두레 일꾼들과 함께 보았다는 이 영화의 내용이 얼마나 심각하였던지 영화상영 내내 숨을 죽인 채 몰두했다고 합니다. 영화의 각본과 제작을 잘 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실제로 이 영화가 던지는 심각한 문제의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는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는 이영화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 즉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
둘째는 기독교 장로와 교인들이 악행을 행하고 악행을 비호하고 있다는 점. 즉 크리스천들의 위선과 가식.
셋째는 판사, 검사, 변호사, 경찰, 교수 소위 기득권 세력 모두가 한 패거리로 어린 장애아들을 짓밟는 일에 공모, 동조했다는 점.
그러면서 특히 크리스쳔들이 이 영화를 반드시 보고 교회 안에 깃들어 있는 거짓과 위선을 자각하고 심기일전하여 교회다운 교회, 교인다운 교인들이 되는 일에 새 출발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글을 마쳤습니다.
내가 대학 학창시절에 스위스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ürrenmatt, 1921~1990)의 <노부인의 방문Der Besuch der alten Dame >을 공부하였고 무대에 올린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클레어 차하나시안이라는 노부인이 고향을 방문하면서 일어납니다. 젊은 시절 가난했던 클레어는 일이라는 청년과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가 임신하게 되었으나 일에게 배신당하고, 친부확인 소송을 했지만 일에 의해 매수된 두 증인의 위증으로 패소하게 됩니다. 귈렌 시를 떠난 후 아이는 죽게 되고 그녀는 창녀가 됩니다. 클레어는 나중에 갑부와 결혼하게 되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여인이 되었으며 일도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지역 유지로 잘 살고 있었습니다.
파산상태에 이른 귈렌 시에 돌아온 노부인이 그 도시를 도와주는 대신 자신을 배반했던 일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녀는 귈렌 시에 10억 마르크를 기부하면서 45년 전 자신을 배반했던 일을 살해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귈렌 시장을 비롯한 시민들이 이 제안을 거절하지만 시의 사정이 점점 어려워지고 일의 가게에 진 빚이 늘어나자 일의 죽음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시 전체가 공모하여 일을 살해하게 되고 그 살인 행위가 민주적 절차를 거친 합법적 행위라고 자위하게 됩니다. 그녀가 준 거액의 돈으로 시는 번영과 복지에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되고 노부인 클레어는 일의 시체를 가지고 고향 귈렌을 떠납니다.
뒤렌마트가 쓴 희곡이 얼마나 생동감 넘치고 무대적 효과가 강한 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처음엔 노부인의 제안을 거절하다가 동네에서 한 두 사람씩 노란 신발을 신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노란 신발을 신은 것을 보면서 일은 공포에 빠져가고 노부인 클레어는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일을 에워싸고 살해에 동참할 때에도 모두 노란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내가 도가니에 대한 기사를 접할 때 옛날에 보았던 <노부인의 귀향>이 연상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시를 운영하던 시의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공동으로 살인에 참여하는 것과 사회의 기득권 세력들이 패거리로 악을 행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위선자들이 가장 숨기 쉬운 곳이 종교입니다. 그래서 교묘하게 침투하여 악행을 일삼아 아무도 믿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 사람을 낙담케 하고 사랑이 식어지게 합니다. 그래도 아직 남은 소수의 신실한 사람들이 있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고귀한 사랑을 품은 분들이 많아지길 기도해야 합니다.
윤명희
2011-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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