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내가 없는 동안 누군가 책상 위에 콤퓨터를 만진 것이 분명했습니다. 분명히 워드 프로세서를 쓰고 있었는데 맥킨토시로 바꿔 있었으며 이리저리 손을 타 헝클어진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가끔 그런 적이 있어 누군가 또 건드렸나보다 생각하며 의도적으로 평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인간인지라 불쾌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이 문제였습니다. 작년 9월에 어떤 단체에 보냈던 똑같은 이메일을 다시 받았다는 연락이 몇 사람들로부터 왔습니다. 그 일은 다 해결되어서 오해했던 것이 풀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이메일을 다시 보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절대 보내지 않았다고 답장했는데 똑같은 이메일들을 받은 후에야 나의 이메일 계좌를 자세히 검토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보낸 편지함에 문제의 9월 이메일이 보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단체의 책임자가 남자이름이어서 들어가 보았으리라는 것은 추정 가능한 일이지만 그 이메일을 다시 보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지켜야 할 예의와 도덕이 있는 법인데 그런 오만방자한 일이 어디 있냐며 격렬하게 힐난하고 싶은 유혹이 밀려왔습니다. 이런 일은 인격모독이며 사적침해로 다시는 못하게 단단히 혼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W. 헤즐리트는 “정직한 사람은 모욕을 주는 결과가 되더라도 진실을 말하며, 잘난 체하는 자는 모욕을 주기 위해 진실을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어떻게 하면 내가 하기 쉽게 말하지 않고 남이 잘 알아 듣게 말 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습니다.
그 러나 비난하기 전에 그 원인이 무엇인지 다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관리 소홀한 나의 책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말이 생각났습니다. “비밀로 해야 되는 인간관계는 처음부터 가지지 말아야 된다. If a relationship has to be a secret, you shouldn’t be in it.” 입니다.
약점이나 열등감이 분노를 일으킵니다. 떳떳하지 못한 무엇을 감추거나 숨기고 싶을 때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숨기고 싶고 어두운 곳을 찾아 다니게 됩니다. 정말 말과 행동이 같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보거나 말거나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방자히 행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분노는 교만입니다. 분명히 성경에 원수 갚는 것은 주님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성을 잃고 고함을 치거나 부르르 떨며 분노할 때, 주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주님 자리에 앉아 남을 비난하며 정죄할 때 사탄은 기뻐서 나를 어둠의 세계에 가둘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상 주시는 이심을 믿고 당신께 기도하고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만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의 이메일을 훔쳐본 그 사람이 나의 선생이었습니다. 내가 감출 것 없이 누구든지 들여다 볼 수 있는 활짝 열린 투명한 세상을 산다면 그것이 평안이요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감추고 싶은 것이 적을 수록 온몸이 가벼워져서 하늘나라로 두둥실 떠올라 그렇듯 하나님 곁으로 날아가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 자신이 직접 고백해야 할 때를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어떤 상황이라도 말씀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겠지요. 남의 잘못을 거울삼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바르게 살아 감출 것이 하나도 없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은 속일 수 없습니다. 영의 세계는 열린 세상입니다.
비밀이 없는 투명한 인간관계가 모든 문제의 해결입니다.
2011/01/21
윤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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