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체질에 맞아서인지 이곳저곳을 다니다보면 교회도 여러 곳을 방문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한 교회는 그럴 듯 한 건물에 제법 교인들도 많았는데 목사의 주일 설교를 듣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한국에 있을 때 미국에서 목회하게 해달라는 것과 큰 교회로 성장시켜 주시어 성공한 목회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다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자신이 올림픽 경기장과 같은 거대한 장소에서 설교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면 수 많은 무리 앞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중심엔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대신 자신이 높이 올라가 있었습니다. 훌륭해 보이는 것과 훌륭한 것은 다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듣는 귀를 무시하는 일그러진 소음입니다.
현 대의 위대한 영성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 박사는 현대 교회는 심각한 예수 결핍 증세(Jesus Deficit Disorder)에 걸렸다고 했습니다. 교회에 예수가 없어 예수나 성령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성공이나 교회성장에 대한 이야기만 무성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영적 파도를 갈망하기보다 겉에 보이는 것에 더 치중하는 교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스윗 박사의 저서 <귀없는 리더? 귀있는 리더! Summoned to Lead>에서 다른 사람의 소리를 귀담아 듣는 것이 중요하다며 비젼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소리로 인한 영적 진동을 증진시켜야 한다며 섬기는 자들(Servers)이 생존자들(Survivors)을 이기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낮은 자세로 먼저 남을 배려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리더십은 음향 예술이라고 했습니다. 리더는 사람들의 반응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리더에 대한 가장 신랄한 공격은 “전혀 우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라는 말일 것입니다. 유아기적 사고방식에 머물러 자기중심적이고 고집스럽기까지 해 벽창호 같다는 뜻일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지휘자가 틀린 음악을 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음악은 제 소리와 제 리듬을 하나로 합칠 때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떨어진 음정이나 빗나간 박자는 음악이 아니라 소음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무질서한 음악은 성령의 역사를 방해합니다.
요즘은 음악 목회자를 따로 세울만큼 음악이 예배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지휘자는 소리를 듣고 그에 따라 지휘를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은 후 그에 맞게 이끌어야 합니다.
지휘자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이 공연하는 줄 착각하여 남들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눈을 감고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 혼자 소리 높여 부르는 것입니다. 지휘자는 공연자가 아닙니다. 그는 참여자 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무시한 채 혼자 큰 소리를 낸다면 교만입니다. 지휘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놓고 먼저 들을 귀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끌 수 있습니다.
스윗 박사는 ‘음악 보기’에서 이렇게 유서프 카르쉬(Yousuf Karsh)의 이야기를 인용했습니다.
“유서프 카르쉬는 캐나다인으로 인물 사진 전문 작가다. 그는 사람의 등을 찍은 유일한 사진은 1954년 프랑스의 아담한 수도원에서 찍은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의 것이었다.
카 르쉬가 장비를 설치하는 동안 카잘스는 바흐의 곡을 첼로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카르쉬는 음악에 도취된 나머지 자신이 왜 이 곳에 와 있는지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감미로운 선율이 흐르는 동안, 카르쉬는 예배당의 고색창연한 벽에 기대어 시간의 흐름을 일순 정지시킨 채, 작달막하고 머리가 벗겨진 한 남자가 첼로 쪽으로 몸을 수그리고 있는 모습을 찍었다.
보스턴에 있는 미술관에서 사진전을 열었을 때, 큐레이터는 노인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짝 치면서 무엇을 하시느냐고 물어 보았다. 노인은 몸을 돌리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쉿! 젊은 친구, 자네는 지금 내가 음악 감상 중이라는 것도 모르시나?”
카르쉬는 카잘스가 바흐를 연주하는 것을 들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 노인은 사진을 바라보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우리에게서 하늘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모두 잃어버린 화음을 찾아서 긴 여행을 떠나야 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2010/12/30
윤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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