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래 사세요>룰 쓰고 엄마에게 보여드렸더니 잘 읽었노라고 하시더니 “나에 대한  개인 이야기가 쓰여지는 것이 왠지 마음에 께름직하다”며 뭐 잘났다고 제 자랑하는 것만 같아 조심스럽다고 하셨다.  그런 엄마의 생각에 영향을 받고 자라온 나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자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고 하는게 아니라 사실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놓인다.

평안북도 초산에 엄마의 외할머니 즉 나의 증조 외할머니 시절에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가 처음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나의 증조 외할아버지와  증조 외할머니 그리고 그 집안 식구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증조 외할아버지는 처음으로 상투를 자르고 장로가 되셨다고 한다.

나의 증조 외할머니는 너무 공부가 하고 싶어 그 당시엔 여자가 글공부하러 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때에 남장을 하고 몰래 들어가서 글을 배우셨다고 한다.

나 의 외할머니가 13살 때 러시아군이 들어와서 마을 전체를 돌면서 식량을 내놓으라며 협박하고 다녔다고 했다.  사람들이 안 빼앗길려고 울고불고 소리지르면서 감추려하는 것을 군인들이 막무가네로 다 빼앗아 갔다고 한다.  그런데 나의 증조 외할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착하셨는지 그 군인들에게 자루를 펴주면서 어서어서 다 담아가라고 하니까 오히려 그들이 뺏은 것을 도로 주고 갈 정도였다는 것이다.

엄마와 엄마의 오빠는 7년차였는데 오빠가 5살때 3.1절이 일어났다고 한다.  오빠는 너무 어려 대한민국만세를 부르지 못해 그냥 딱딱만세라고 부르면서 막대기를 두둘기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 당시 믿는 사람들은 다 붙잡아가서 외할아버지도 독립만세를 부르다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셨고, 외할머니도 독립만세 부르다 모두 붙잡혀 들어가게 되셨는데 마침 둘째 언니를 임신중이라서 그냥 돌려보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의 큰 형은 독립만세를 부른 장로라고 해서 3년동안 감옥에서 어찌나 많은 문초와 고문을 받았던지 그렇게 든든했던 분이 다 죽게되어 그제서야 감옥에서 내어보내 출옥한지 10일만에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큰 외할머니는 29세에 딸 둘, 아들 하나를 둔 과부가 되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딸 하나도 세상을 떠나 자녀 둘만 남게 되었다고 했다.  엄마는 내게 항상 “너의 큰 외할아버지는 순교하셨단다”라고 들려주셨다.

교 회의 장로셨던 나의 외할아버지가 초산에서 6년제 초등학교를 처음으로 설립하셨다고 한다.  이름은 믿음을 북돋아 주는 학교라는 뜻으로 배신(培信)이라고 지었다고 했다.  엄마는 그 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하여 멋진 탁상시계를 선물로 받았었는데 피난 나오면서 못가지고 온 것을 못내 아쉬워하셨다.  그 학교를 엄마의 막내 남동생까지 졸업한 후 몇 년 되지않아 일제의 간섭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한국 인구가 이천만이었다며 엄마는 그 때 노래를 들려주셨다.  백두산 뻣어나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동산에 역사 반만년/ 대대로 이 강산에 우리 이천만/  복되도다 그 이름 대한이로세.  물론 일본사람들은 절대로 이 노래를 못부르게 했다고 한다. 시름시름 아프시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는 너무 상심해 마음이 아퍼서 강계에 가서 1년동안 신학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그 후 송목사님이 담임이셨던 교회에서 권사로 얼마동안 월급 받고 시무하시다 큰 아들이 생활비를 벌게되어 무료로 봉사하실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해주로 이주하게 되어 그 일도 그만 두시게 되었는데 그 당시 엄마의 나이가 16살이었다고 한다.

엄마가 17살 되던 해에 의사공부를 하고 싶어 일본에 가려다 사람들이 모두 일본도 배급제라 굶어죽게 될 것이라며 이곳에선 먹을 것이라도 있지만 그곳에선 야미쌀이라도 사먹을 수 있겠느냐며 극구 말려서 못가게 되었다고 한다.

엄 마는 내게 항상 그때엔 무엇이나 할 자신이 있었고 정말로 일본가서 공부하고 싶었다고 하셨다. 일본행을 접고 혼자 공부하러 서울로 가서 일본인 병원인 다께다 산부인과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19살 때 조산원 자격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에 연대 간호사로 일하면서 의사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해주에 계신 외할머니가 21살인데 결혼도 안한 노처녀가 되려느냐며 하도 딸이 서울에 혼자 너무 오래있다고 하시는 바람에 해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 남자는 의용군으로 여자는 위안부로 끌려가던 시절이였는데 여자들에게 돈벌고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며 꾀었다는 것이다.  처녀들은 공출해 간다고 무서워해서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은 모두 16 ~ 18살이면 시집갈 때였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해주에 있던 일본인 병원에서 실습하게 되었는데 일하는 것을 보고 당장 채용했다고 한다.

병원에서 일하던 엄마는 둘째 언니 중매로 해주사범대학을 나온 남자와 22세에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해 1945년 해방되던 해에 임신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바로 남한하시고 그 이듬 해 오빠를 낳았고 엄마는 아버지와 헤어진 지 일년 반 후인 25살 되던 해에 어린 오빠를 안고 탈북하게 되셨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나의 엄마를 떠나보낸 후 움막에서 엄마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사위가 곰살스럽지 못해 딸이 혼자 아이들을 키우려면 얼마나 고생하겠느냐며 많이 우셨다는 것이다.

남한에선 한국전쟁 후 종로에서 살면서 근처에 있는 승동교회를 수십년간 다니셨는데 내가 결혼한 후 미국와서 살 동안 4년간 승동교회 주최로 열렸던 전국 성경암송대회에서 계속 상을 받으셨다.  첫 해엔 아가서, 둘째 해엔 미가서를 암송하셨는데 각각 전국 2등을 하셨고 3년째 베드로전후서에선 일등상을 받으셨고 마지막 4년째 느헤미아서에선 전국 최우수상을 받으셨다.  지금도 앞으로 성경도 보지 못할 마지막 시대가 올런지 모른다며 계속 암송하신다.  창세기나 요한계시록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시는 것을 보면 놀랍기만 하다.

엄마가 딸의 초청으로 1980년 1월 17일에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셨다.  사실 엄마는 실질적으로 우리 아이들을 다 키우신 분이다.  사람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할머니는 엄마가 되고 엄마는 큰 언니 같다고들 했다.  내게 엄마는 하나님의 크나큰 축복이다.

엄마는 일생이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 꿈만 같다고 하신다.  크고 작은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났지만 거의 다 잊혀지고 그저 큰 일만 생각난다고 하신다.  17~19살 땐 꿈도 많았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학교에 못가면 독학이라도 해서 검정고시로 의사면허를 받아서 지방의사라도 되고 싶으셨다고 한다.

옛날엔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 같았으면 절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결혼도 공부를 위해서라면 포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신다.  엄마의 꿈이 손녀에게 이루어진 것 같다.

나는 엄마의 일생을 들을 때마다 백발이 성성했을 야곱이 바로왕 앞에 섰을 때의 모습을 떠올린다.

파라오가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야곱이 파라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삼십 년이 되었습니다. 제 조상들보다는 짧게 살았지만 고통스러운 삶이었습니다.”

2008/08/31
윤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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