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지배를 받았던 동독은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서독에 비해 발전속도가 더디다. 공산치하에선 모든 사람들이 균등한 생활을 해야 한다 하여 멋없이 늘어진 창고같이 생긴 획일적 무채색 집들과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해 높이 지어진 을씨년스런 낡은 감시대가 아직도 이곳저곳 방치된 곳이 있어서 지나가는 여행객들의 마음을 잠시 서늘하게 하기도 한다.
베를린에서 13번 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전쟁으로 폐허가 다 되었다가 통독 후 복구작업으로 발돋움하는 ‘엘베강의 플로렌스’였던 유명한 드레스덴(Dresden)이 있는데 그곳을 지나 체코 국경 근처에 웅퉁불퉁 절벽바위들이 솟아 있어 ‘삭슨(Saxon)의 스위스’라고 부르는 바스타이(Bastei)에서 엘베강을 굽어 보며 자연의 경이로움을 만끽한 후 다시 72번 도로를 타면 9번 도로를 만나는데 남쪽으로 내려가는 이 도로는 뮌헨(Munich)으로 이어지고 계속 가게되면 오스트리아까지 맞닿게 된다.
뮌헨 전에 히틀러의 나치대회가 열렸었고 패전 후 나치 전범재판으로 유명했던 누렘베르크(Nuremberg)라는 도시가 있고 그 전에 바이로이트(Bayreuth)라는 인구 7만명인 작은 도시가 있다. 바이로이트에는 1876년에 지어진 위대한 작곡가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오페라 하우스가 있다.
독일에서 최고로 잘 보존된 바로크풍 극장 중 하나이다. 처음 바그너는 뮌헨에 지으려다가 나중에 바이로이트로 뜻을 바꾸었는데 그 이유는 너무 남쪽에 있는 뮌헨보다 지형학상 독일의 심장부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백조의 왕으로 불리던 비운의 루드비히 2세(Ludwig II, 1845~1886)는 언제나 독일여행 안내서 표지를 장식하며 수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아름다운 노이슈반슈타인 궁전(Neuschwanstein Castle, 1869~86)을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루드비히 2세는 12살 때 이미 로헨그린(Lohengrin)이나 백조의 기사(Swan Knight)같은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되었으며 바그너는 일생동안 그의 음악적 우상이 되었다.
이 동화 속 궁전의 중심이 되는 휘황찬란한 음악극장에서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Tannheuser, 1843~44 작곡)’의 장면을 공연무대로 설치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궁전을 짓고 있을 때 루드비히 2세가 바그너에게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그의 오페라 하우스를 지을 수 있었다.
바그너가 1872년부터 살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쏟았던 바이로이트에는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7월 25일부터 8월 28일까지 바그너 페스티벌이 열려 온 세계에서 바그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독일 베를린 슈타츠오퍼 국립오페라단의 연광철(39세)씨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2002~04까지 ‘탄호이저’의 헤르만 영주 역으로 독일 바그너 축제에 출연한다고 한다. 연광철씨는 충주에서 농사꾼의 장남으로 태어나 충주공고 건축반을 다니다 졸업 때 90%가 붙는 건축기능사 자격증 시험에 떨어지는 바람에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실의에 빠졌던 그가 고교 2학년 때 교내 음악경연대회에 1등 했던 일이 생각나 음악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바꿨다. 모교인 공고에는 피아노조차 없었고 집안 형편에 서울로 가서 레슨 받을 엄두도 못냈다고 한다. 고민 끝에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털어놓았더니 아버지는 그의 태몽이 ‘지붕에서 잘 생긴 수탉 한 마리가 우는 것이었다”면서 아무 말없이 풍금을 사주었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피아노학원에서 기초과정인 ‘바이엘’을 배우고 집에 돌아와선 노래연습으로 조용하기만 하던 시골마을에 밤마다 소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청주대 음악교육과에 합격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백도 끈도 없었던 그였지만, 그의 목소리와 성실함을 남다르게 보았던 한 교수에 등 떠밀려 2학년 때 나간 콩쿠르에 1등상을 타게 되었다.
그 후 여러 대회에 나갔는데 모두 2등을 하는 것을 본 교수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유학을 권유했다고 한다. 돈도 없던 그가 찿아간 곳은 불가리아 소피아국립예술대학이었는데 노래를 들은 후 그의 잠재력을 보고 즉시 독일 베를린국립음대에 추천해주었다고 한다.
1992년 베를린음대에 입학한 후 다음 해에 프라시도 도밍고의 이름을 내건 성악 콩쿠르가 있었다. 뮌헨에서 열린 예선에선 떨어졌었는데 본선 진출 32명 중 1명이 출전할 수 없게되는 바람에 대타로 나가게 되었다가 대상을 받으면서 ‘세계 오페라계에 보석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도밍고의 찬사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텃세가 심한 유럽음악계에 단신(170cm)인 동양사람으로 프로오페라 무대는 버겁기만 했지만 끊임없는 연습과 독일어 공부로 실력향상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다 1999년 마이어베어 작품인 ‘악마 로베르’의 주역 베이스를 맡은 이탈리아 성악가가 펑크를 내는 바람에 그가 대타로 출연하여 관객들을 사로잡고 독일 비평계의 온갖 찬사를 받으며 슈타츠오퍼의 간판스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과거는 역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한국의 교육, 특히 음악교육이 허황된 꿈을 키운다”며 “학생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보다는 무조건 성공한 사람의 모델을 답습하게 하는 경우가 많아 이 때문에 학생들이 처음부터 너무 큰 꿈을 꾸다가 중도에 좌절하기 쉽다”라며 일침을 놓았다고 한다.
어디 음악분야 뿐이랴. 과연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그가 존재할까?. 그가 2004~05년 바그너의 ‘탄호이저’에 한국 남자성악가로는 처음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서게 된다고 한다. 조악한 환경에서도 절대 희망을 잃지 말라는 산 모델이다.
한국에서 불어오는 온통 불쾌한 소식에 마음이 오염되었다가 이같은 기쁜 소식에 상쾌해지면서 벌써 마음이 들뜬다. 불굴의 음악도인 연광철씨에게 마음의 갈채를 보내며 이미 정상에 올랐지만 더욱 발전하길 바란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올해 배우 니콜 키드먼과 러셀 크로를 오스트레일리아의 살아있는 국보(國寶)로 선정했다는데 한국에도 이런 참된 인물들이 많이 일어나 진정한 국보급이 되어 보석처럼 밤하늘을 빛내주었으면 한다.
2004/03/24
윤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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