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13년간 기다린 그루베로바의 ‘청교도’
매진인 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소프라노 에디타 그루베로바가 나오는 오페라 ‘청교도(淸敎徒)’에 표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취리히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기다렸다. 그때까지 보려고 마음먹고 찾아갔던 공연이라면, 어떤 극장도 들어가지 못한 적이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한 장이라도 반환되는 표가 있거나, 누가 나타나서 표를 팔거나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믿는 징크스였다.
그런데 그날은 아니었다. 정말 표는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들 즐겁게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문이 닫혔다. 나는 로비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난생처음으로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돌아서야 했다.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인 벨리니의 ‘청교도’ 앞에서….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서 맥주를 시켰다. 악사들이 즐겁게 요들송을 부르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슬픈 요들송이었다. 머릿속에는 벨리니의 선율만 맴돌 뿐, 요들송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루베로바의 ‘청교도’가 한(恨)으로 맺혔다면 거창한 말이고, 이루지 못한 숙제가 되어버렸다. 그녀의 음반이나 영상은 들어보았지만, 실황으로 그녀의 ‘청교도’를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유럽 구석구석의 오페라하우스를 섭렵하면서 그녀의 ‘안나 볼레나’ ‘노르마’도 보았고, 다른 이들이 부르는 ‘청교도’도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청교도’만은 보지 못했다. 슬로바키아 출신의 에디타 그루베로바는 20세기 후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대명사로, 도니체티와 벨리니의 오페라에서는 당대 제1인자다.
오페라를 보러 다닌다는 것은 나에게 산악인이 산을 오르거나 구도자가 현자(賢者)를 찾는 것과 같다. 오페라는 인간의 지혜가 만들어낸 최고의 예술이다. 내가 오페라를 보는 동안 오페라의 음악은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내 귀를 가려주고, 오페라의 무대는 세상의 천박함으로부터 내 눈을 지켜준다. 게다가 오페라에는 음악·미술·연출은 물론이고, 품격 넘치는 문학이 있고, 신화가 있고, 역사가 있고, 인생이 있다. 오페라 무대는 나에게 세상과 예술을 가르치는 학교였고, 척박한 인생에 활력을 주는 샘물이었다. 나는 모든 영감을 오페라에서 얻었고, 감정을 오페라에서 정화시켰다.
그 후로 그녀의 ‘청교도’를 보게 되기까지 13년의 세월이 필요하리라고 그때는 생각 못했었다. 2010년 정초, 그 겨울의 빈은 정말 추웠다. 뼛속까지 시린 날씨에 빈 국립 오페라극장에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하여 앉았다. 그 한 시간이란 그녀의 ‘청교도’를 기다린 세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휘봉이 극장의 공기를 가른다. 벨리니 특유의 서주가 시작된다. 하지만 오늘 테너와 바리톤이 너무 나쁘다. 실망이다. 관객들도 냉담하다. 테너가 저렇다면, 이건 ‘청교도’가 아니라 ‘탁교도(濁敎徒)’가 아닌가?
그리고 등장한 그루베로바는 60대 후반이었다. 그녀는 유명한 ‘광란의 장면’에 모든 것을 걸었다. 아주 잘 부른다. 허나 연기는 실망이었다. 연로한 신체로 난해한 기교를 구사하려니, 감정표현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녀를 부정하기에는 기교와 발성이 너무나 좋다.
‘광란의 장면’이 끝나자 엄청난 박수가 쏟아진다. 공연은 중단되고, 그녀는 세 번이나 나와 커튼콜을 받는다. 빈 사람들의 그녀 사랑은 대단하다. 그녀가 20대에 명성을 얻은 곳도 빈이니, 그녀에 대한 그들의 오랜 애정을 내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보이고 들리는 것만으로 판단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피날레는 훌륭했다. “우리가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아시나요?”라고 그녀가 묻자 테너는 “석 달”이라고 답한다. 이에 그녀는 “아뇨. 300년 되었습니다. 300년의 순간마다 당신을 그리고, 순간마다 당신을 불렀습니다”라고 말한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렇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나는 지금 벨리니의 위대한 걸작을 듣고 있으며, 평생을 벨리니 오페라에 헌신한 위대한 예술가를 보고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기립박수. 관객도 연주가도 행복했다. 나도 가슴에 뭉클한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십수년 전에 헤어진 애인을 다시 만나보니, 그때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때 내가 듣지 못한 ‘청교도’는 결국 듣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렇게 오페라란 매번 다른 것이고 늘 새로운 것이다. 나는 또 내일 오페라 극장을 찾을 것이다.
2011. 04. 19.
-박종호 정신과 전문의 풍월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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