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격변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매일을 살았던 1980년대 중반. 신혼여행 중에 떠오른 노래 한 곡이 삶에 지친 나와 이웃들의 목마름을 채워주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막 피어난 보리 꽃/ 논두렁을 수놓은 자운영 꽃 무리/ 아침이슬 머금은 작은 제비꽃/ 골짜기를 흐르는 맑은 시냇물. (김정식 작사•작곡 ‘내가 좋아하는 것’ 중에서)
‘교사회보’에 실려 전국의 모든 학교로 스며든 이 노래 때문에 만난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님과의 꿈결 같은 추억 한 자락이 자운영꽃빛으로 아롱거린다. 당시 근무하셨던 ‘샘터사’에서 주최한 행사에 노래손님으로 자주 초대해주셨고, 훗날 몇 차례의 방송프로그램도 함께 하는 등 내 노래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셨다.
1987년 가을. 돼지를 키워 어렵게 꾸려가고 있던 구 일산지역 공부방 ‘밤골 아이네’에 불이 났고, 그 손실을 메우기 위해 자선음악회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 귀하신 분들이 오셨다. 내게 여러 편의 노랫말을 써 주신 시인 유경환님과 동화작가 정채봉님이신데, 해맑은 소년의 웃음으로 맨 앞줄에 나란히 앉아계셨다. 정채봉님께서는 그 후 장편동화 ‘초승달과 밤배 2’라는 작품에 그날의 정경을 그림처럼 묘사하셨고, 유경환님께서는 공연현장에서 쓰신 시 ‘무지개’를 보내주셨는데, 우편으로 받아 들고 읽는 순간 노래가 되었다. (월간 경향잡지 2007년 7월호에 실린 필자의 글 ‘무지개’ 중에서)
첫 인연은 <초승달과 밤배>라는 선생님의 성장소설을 읽고 나서였다. 자운영에 얽힌 어린 날의 추억을 특유의 필치로 그려놓으셨는데, 내 어린 날의 그것과 묘하게 일치했기에 실재했던 추억의 공유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동화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는 내 꿈은 세상에서 동화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꿈을 이루신 거 아닌가요?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못해봤어요.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처럼 세상에 드러난 위대한 작곡가들도 많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천수만의 작곡가들이 있고, 그들이 있기에 위대한 사람도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위대한 작곡가가 있도록 아래를 받쳐주는 수천수만의 작곡가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꿈을 가졌던 셈이네요.”
“예술창작인 중에 그토록 소박한 꿈을 지닌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어서 신선한 충격입니다. 동화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내 꿈을 바꾸고 싶지는 않지만, 가능하면 자주 만나서 다른 시각으로 나를 조율하고 싶네요.”
가랑비가 오는 가을날, 충무로 진양상가 근처 생선구이 집에서 저녁과 함께 소주 몇 잔을 드시면서 들려주신 얘기는 그분이 쓰신 동화만큼 아름답다.
“새 작품이 완성되어 원고지에 옮기고 나면 십중팔구 늦은 밤이거나 새벽입니다. 자는 사람을 깨워서라도 꼭 그 순간에 들려주고 싶은 거예요. 친구에게 전화해서 읽어주고, 어떠냐고 물었더니 아무 대답이 없어 슬펐어요.”
“저도 일상처럼 겪는 일이에요. 누나가 그중 마음이 약해서 자다 전화 받는 일이 많은데, 그래도 노래를 듣다가 잠들지는 않던데요.”
천주교에서 세례 받은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신부님은 들어주실 것 같아서 성당으로 찾아가 사제관의 벨을 눌렀다고 한다.
“신부님. 저 프란치스꼬인데요. 새 동화를 썼는데 들어보실래요?”
“아, 네.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새벽 3시에 꼭 들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면 내일 아침에 들으면 안 될까요? 새벽미사를 위해 자야 하거든요.”
성당 입구를 돌아 나오다 보니 밝은 불빛 아래 성모상이 환히 웃고 있었다.
“성모님. 제가 새 동화를 썼는데 읽어 드릴 테니 들어보셔요.”
다 읽고 성모상을 보니 처음과 표정이 똑 같아서 듣고 계신 것 같지 않았다. 슬픈 마음을 안고 집을 향해 오다가, 희미한 불빛 아래 졸고 있는 포장마차 주인 앞에 소주 반병을 시켜놓고 앉았다.
“몇 시에 들어가셔요? 제가 동화를 하나 썼는데 들어보실래요?”
“벌써 들어갔어야 하는데 피곤해서 졸다가 깜빡 잠이 들었네요. 뭔지는 잘 모르지만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 얼른 읽고 가세요.”
꼬박꼬박 졸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읽어주고 집으로 가는 길에 펑펑 울었는데, 어디서 그토록 많은 눈물이 고여 있다가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졸면서라도 들어준 사람이 있어서 행복하셨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늘 외로울 수밖에 없는 창작인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을 거예요. 저도 곡이 떠오르는 것은 일상 중이지만 악보를 정리하고 나면 대부분 새벽이었어요. 그런데도 꼭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거든요. 그러니 앞으로 선생님은 새 동화를 쓰시면 아무 때고 제게 전화를 주셔요. 저도 새 노래가 나오면 전화를 드릴게요.”
실제로는 한 번도 그리 해보지 못한 채 보내드리고 말았지만, 언제라도 전화하면 내 노래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었고, 그분이 정채봉 선생님이어서 더욱 행복했었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그립다.
-김정식 가수 겸 작곡가. 우리신학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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