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정오 무렵인데도 여전히 한가하다.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서해 바다가 오늘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그런대도 수많은 무역선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오고 또 나간다. 무엇을 싣고 어디로 가는 건지 늘 그렇다. 그들은 차가운 바닷바람도 날리는 눈발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멀지도 않는 인천대교 타워가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눈가루로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잔뜩 찌푸린 전형적인 겨울 날씨다. 아침부터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다. 이번에는 전국적으로 눈이 많이 온단다. 그래도 눈은 와야 한다. 눈이 없는 겨울은 겨울이 아니다. 겨울이 없으면 여름도 없다. 그러면 더 이상 우리는 제대로 살 수가 없다.
내 등에서는 지금 두 돌이 가까운 귀여운 손자가 막 잠이 들었다. 할아비 등은 딱딱해서 편할 것 같지가 않는대도 잘도 잔다. 잠이 올 때면 어부바 하는 즉시 곧장 내 등에 철썩 업힌다. 혈육인 내 손자라서 그렇지 다른집 아기라면 반푼어치 어림도 없는 일이겠다. 나의 존재가치를 보존해 주는 존재가 손자다. 지금의 이 모습 이 상태 그대로도 손자는 나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있다. 그러니 이 손자가 어찌 내게 소중하고 사랑스럽지 않을 손가. 지금 이 세상에서 나를 진정으로 좋아해 주는 존재는 어린 이 손자 말고는 아무도 없다. 내일 일은 알 바 아니다. 아무런 이해관계나 타산이 없이도 말이다.
그와 나 사이에는 오직 순수한 감정만 있을 뿐이다. 그와 같이 있으면 내 마음도 그와 같아진다. 나는 그가 있어 그 존재 자체가 좋고 그는 내가 그를 좋아하기에 나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이 순수한 사랑이고 인간적인 인간관계일 것이다. 손자를 업을 때면 나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한가하기만 하던 내가 그를 업고 있을 때는 내 존재가치를 찾는다. 삶의 의미를 찾고 사는 맛이 난다. 내 등이 이 고귀한 생명의 안식처가 되다니! 이 보다 더 숭고하고 행복하고 보람있는 삶의 활동이 어디 있겠는가.
집사람과 어미는 길에 눈이 더 많이 쌓이기 전에 갔다와야 한다면서 볼일을 보러 방금 출타를 했다. 집에는 나와 어린 손자 둘 뿐이다. 아침 먹고 몇 시간 동안을 그는 나와 신나게 놀았다. 녀석은 여간해서 우는 일도 없고 너무 의젓하다. 고슴도치도 제새끼는 귀여워한다더니 남에게는 나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좋은 걸 좋다는데 뭐가 흠이 되겠는가. 잠이 좀 더 깊이 들어야 내려 놓을 수가 있다. 녀석을 업은 등이 왜 이리도 따뜻한가. 스킨십을 통한 아가의 체온, 그건 황홀하리 만큼 내 기분을 상쾌하게 하고 활력이 솟아나게 한다.
이제는 체중을 의식할 만큼은 된다. 14~15kg의 무게라면 제법이다. 한참을 업고 있거나 안고 있으면 나도 약간 힘이 들 정도다. 할머니인 집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힘 안 들이고 행복과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일이 아니다. 가족 중에 누가 해도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행위일 뿐이다. 그래서 한가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 보는 것은 당연하고 보람있고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이것은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니라 일석사조오조가 되는 실속 있는 활동이다.
하기야 요사이 나는 한가하지 않는 시간, 한가하지 않는 날이 없다. 1년 365일 마냥 나는 한가하다. 사람이 살다가 이런 때도 다 있는가 싶어 가끔은 이상한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내가 과연 이런 막연한 삶을 살아도 되는 것인가. 의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책임도 없다. 꼭 해야 할 일이 없다는 말이다. 일이 있어도 그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그런 성격의 것이다. 그야말로 자유만 있다.
없다 없다에다 있다이니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는 플러스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플러스 인생을 사는 것인가. 플러스 인생이라면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남에게 도움을 주고 봉사하고 사회와 국가와 인류에 공헌하는 삶이 플러스 인생인가. 이 정의는 너무 거창하다. 나 자신에게만 국한하기로 하고 그 의미를 축소해보자. 그렇게 계산해보면 지금의 내 삶은 수학적으로도 분명 플러스 인생이다.
그런데 플러스 인생이면 다 좋은 것인가. 아니다. 이런 플러스는 결코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마이너스 또한 우리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삶의 한 형태다. 가감승제(加減乘除)는 왜 있어야 하는가. 더하기만 할 줄 알아서는 셈을 아는 것이 아니다. 빼기가 없이는 더하기란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다.
플러스만 있어서는 안 된다. 마이너스도 필요하다.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셈법을 모르고는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릴 적은 덧셈, 뺄셈부터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모자라면 더하고 많으면 빼야 한다.
나는 지금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어쩌면 나는 지금 덤으로 산다고도 할 수 있다. 제 2 인생은 언밸런스(unbalance)이어도 좋다는 말인가. 아니다. 불균형 상태로는 오래 가지 못한다. 오래 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려면 제대로 길을 가야 한다. 그래야 남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이고 모자라는 것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균형(balance)을 맞추고 삶을 조화롭게 해야 한다. 지금 나의 삶은 균형을 잃은 상태다. 그러니 조화롭지 못하다. 조화롭지 못하면 잡음이 생기고 탈이 난다. 내게는 자유가 넘쳐나고 의무와 책임은 모자란다. 이런대도 내 삶을 플러스 인생이라 하겠는가. 아니다. 그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다.
산다는 것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생즉사(生卽事)다. 운동하는 것, 배우는 것, 봉사하는 것, 친구 만나는 것, 손자보는 것, 사랑하는 것, 메일 하는 것도 다 일이다. 삶의 의미는 자기가 하는 일에서 찾아야 한다. 일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일을 찾아야 하고 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일이 없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그런 삶은 무의미한 삶이다. 무의미한 삶을 고집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자세는 아니다.
자유롭기만 한 처지에서는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참된 자유의 의미를 모른다는 말이다. 생명의 공기를 호흡하면서도 우리가 그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그렇다면 결국 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래서 이런 허튼 수작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나에게는 그 토록 소중한 자유가 자유를 구속하기에 이른 것인가. 과유불급(過猶不及) 현상이라도 발생한 건가. 말 타면 종노릇하고 싶어한다더니 그런 꼴인가.
책임도 의무도 없으면 권리 또한 있어서는 안 된다. 행복추구권도 없어야 함은 물론이겠다. 그런데도 그렇지가 않다. 내게 무슨 특권이라도 부여되어 있는 겐가. 하루하루를 잘만 지내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이것이 잘 살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는 것인지도 때로는 헷갈릴 지경이다. 하도 한가하다 보니 생각이 이렇게 바쁘다. 쓸데없는 공상에서부터 명상, 상상, 망상, 잡상(雜想)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이게 바로 한중망(閑中忙)이겠다.
2010. 12. 27.
庚寅 歲暮 仁川 松島에서/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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