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목요산행일이다. 내가 참가하는 덕산산악회에서는 주 두 번 산행을 한다. 화요일은 새로 만들어진 서울의 명물, 북한산 둘레길을 걷거나 보통 서울근교의 유명 산들을 찾아 비교적 가벼운 산행을 하고, 목요일은 주로 본격적인 장거리 산행을 한다. 여기서 장거리 산행이란 반드시 멀리 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높은 산, 어렵고 험한 산을 찾는다는 의미가 더 가깝다 하겠다.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 젊은 층의 산꾼들 가운데는 그런 산행을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들은 고도가 아주 높거나 코스가 험한 산을 타는 데서 산행의 묘미를 느끼고 의미를 찾는다. 낮고 밋밋한 산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매력도 주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설악의 공룡능선에 오르고 빙벽을 타고 설산 히말라야에 죽음을 무릅쓰고 도전을 하는 것이다.
수도권의 일일 관광지와 주말 휴양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높고 험한 산들이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도 얼마든지 있다. 등산가들이 좋아하는 강원도의 설악산, 오대산, 치악산 등과 경기도의 화악산, 명지산, 용문산, 연인산 등이 모두가 그런 범주에 들어간다.
지금은 설악산을 갈 때도 새로 생긴 서울 춘천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쉽게 갈 수 있게 된 세상이다. 오늘 원주 치악산을 가는 데도 그랬다. 먼저 중앙선 전철 종점 용문까지 갔고 거기서 다시 기차로 원주까지 쉽게 갔다.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된 데가 얼마나 많은가. 10년, 20년 전에 비해 우리 일상의 모든 분야가 눈부신 발전을 했듯이 산행 문화 역시 그렇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다. 산행을 하는 데 있어서도 1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나는 요즘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산행을 시작하게 되면서 이러한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우선 등산 장비만 하더라도 그렇다. 등산복, 등산화, 배낭은 말할 것도 없고 모자, 양말, 장갑, 스틱, 우의, 아이젠, 플래시 등 모든 등산용구가 디자인이나 기능면에서 너무도 발전하고 편리해졌다. 등산하기가 너무 수월해졌다.
옛날에 다녔던 같은 산을 다시 가봐도 그렇다. 설악산도 그랬고 치악산도 그랬다. 산은 옛 산이로되 길(등산로)은 옛길이 아니로다. 등산로가 너무 잘 정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팔공산의 갓바위 길이 그렇고 동봉이며 비로봉과 서봉에 오르는 수태골의 등산로가 그러하듯 설악산, 치악산, 지리산, 소백산 등 전국 유명 산들의 등산로가 거의가 다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물론 우리 나라 모든 산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다 다녀보지도 않았거니와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도 없겠다. 그러나 얼마 전 과거보다는 훨씬 안전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니 내가 만약 젊은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산행을 내 맘대로 할 수 있겠고 정말 맘껏 즐길 수가 있겠다 라는 생각을 어찌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산행 도중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부럽기 한량없다. 나이 든 사람에게 가장 부러운 것은 젊음이다. 오로지 젊음뿐이다. 겉으로야 점잖도 빼보고 아닌 척도 하지만 속엔 패배의식뿐이다. 나는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픈데 그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의 다리는 철각(鐵脚)이다. 여러분은 TV 동물의 왕국에서 늙은 사자가 젊은 사자에게 주도권을 뺏기고 자기 영역에서 쫓겨나는 처량한 모습을 본 적이 없는가. 사람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젊은이는 승자요 늙은이는 패자다. 산에서 나는 그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제 이빨 빠진 늙은 사자다. 그들과 싸워도 이기지 못한다. 패자가 승자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산행을 해보면 젊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내가 다시 도전하는 지금의 산행이 나에게는 너무 힘이 들고 벅차다. 오늘 사다리병창을 타고 다녀온 치악산 비로봉(1,288m) 산행이 그랬고, 두 주 전 한계령에서 귀때기청봉(1,578m)을 넘어 대승령까지 가서 장수대로 내려오는 설악산 서부능선 타기가 그러했다. 사람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그런 나를 보고 잘한다. 놀랍다. 대단하다 고들 말을 한다. 그런 말을 듣는 내 심사는 결코 편하지가 않다.
결코 그런 게 아니다. 내가 나를 알지 남들이 어찌 나를 아랴. 10년 전 아니 5년 전만 해도 지금 같지는 않았다. 그런대로 산행을 잘 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힘 들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지금 같은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미쳐 몰랐다. 이제부터는 차라리 내 스타일대로 나홀로 등산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남들, 젊은 일행들과 비교가 되기 때문에 더 그런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게 아니겠는가.
요즘은 한 해 한 해가 다르다. 체력에는 분명 한계 나이 같은 게 있는가 보다. 다시는 옛날로 아니 5년 전 수준으로도 돌아갈 수는 없겠다. 내가 왜 갑자기 이런 넋두리를 늘어놓나. 좋은 날 좋은 산행 잘 하고 나서. 이순(耳順)을 넘긴 지가 도대체 언젠데 아직도 이러고 있는가.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는 건가.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한다 했거늘.
이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생각도 다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겠다. 아서라!
욕심, 더구나 노욕(老慾)은 금물이다.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욕심 버리고 내려 놓고 낮추고 겸손하고 양보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하며 허전한 심사를 달랜다.
2010. 11. 04.
林谷齋 / 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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