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반경이 되자 부시시 잠에서 깨어난다. 평소 일어나는 시간이 그렇단다. 씨~익 황소 웃음을 하면서 일어나서는 내 방으로 건너와 문을 연다. 나는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번쩍 안아 올리면서 “잘 잤어”를 연발한다. 이런 손자가 어찌 귀엽지 않을 손가. 연신 귀여운 짓만 한다. 지난해 한 집에 살 때는 겨우 기어 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터 녀석은 아침에 눈을 뜨면 어김없이 머나먼 내 방까지 배로 기어 거실을 건너와서는 문을 열고 할아비에게‘아침문안인사(?)’를 드리곤 하던 관행이 있다.

기저귀를 보니 밤새도록 쉬도 한 번 하지 않았다. 얼른 쉬를 시켰다. 예쁘게 쉬를 잘도 한다. 쉬 통이 넘을 만큼 양이 많다. 자고 나면 대개 우유나 물을 마시고 토마토를 먹는다. 별 맛도 없는 토마토를 어린 것이 잘도 먹는다. 먹는 게 그저 신통하기 이를 데 없다. 한참 있더니 “응가”! 하고 신호를 보낸다. 곧장 변기에 올려다 앉혔다. 틀림이 없다. 이만하면 이제 다 키웠다는 소리가 날만도 하다.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서 하는 말을 놓지지만 않는다면 더 이상 실수는 없을 만큼 발전했다. 이제는 제법 말도 흉내를 잘 낸다. 짧은 단어 수준을 넘어 가히 문장 수준으로(?)까지 따라 한다. “아빠 곰은 뚱뚱해”라는 노랫말은 제법 알아 듣게 따라 하기도 한다.

낮엔 나와 같이 바깥에 나가 놀았다. 나가고 싶을 땐‘바깥에’하는 소리까지 할 줄 안다. 걷다가 싫어지면 ‘안아’하고 명령을 내리기까지 한다. 아파트 정원의 꽃사과 나무에 조롱조롱 매달린 열매를 보더니 따 달란다. 번쩍 들어올렸더니 몇 개를 땄다. 사과 따는 것이 재미가 있었던지 그렇게 하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 했다. 놀이터에 가면 미끄럼틀, 시소, 그네 등 각종 놀이기구 하나하나에 다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는 일일이 올라가보고 타보고 등 한다. 아직은 너무 어려 그것들을 즐길 만큼은 물론 아니다.

그 다음에는 길 건너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넓은 운동장에 들어서자 신이 나서 땅바닥은 아예 내려다보지도 않고 천방지축 마구 앞으로 내닫기만 한다. 아직은 걸음걸이가 안정이 된 상태가 아니다. 뒤뚱뒤뚱 걷는 자세가 얼마나 불안정한지 뒤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언제 턱이나 돌멩이 등에 걸려 넘어질 지 모른다. 좋은 길은 피하고 장애물이 있는 어려운 데로만 곧장 들어가기 좋아한다. 그래도 녀석은 신바람이 나고 그저 좋기만 하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지켜봐야 하는 1급 경호원인 나는 더 없이 행복하다.

어미 아비는 볼일을 다 보고 토요일 밤 늦게 서야 집에 왔다. 그들은 애를 떼어놓은 지 하루 반쯤 지나고 온 셈이다. 그 사이 녀석은 어미, 아비와 전화를 몇 차례나 하기도 했다. 수화기를 귀에다 대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열심히 듣는다. 엄마, 아빠, 이모, 할… 등 큰 소리로 제법 능수능란하게 통화를 한다. 이젠 스마트폰이나 휴대폰 등으로 전화 걸기도 잘 한다. TV, 컴퓨터, 선풍기, 녹음기 등 전자제품이나 각종 도구, 기기 등을 조작하는 실력이 이미 할머니, 할아비를 앞선지는 오래됐다.

말을 하지는 못해도 대개 알아듣기는 한다. 떼를 쓰다가도 어른들이 차분히 쉬운 말로 상황 설명을 하고 타이르면 이해를 했는지 곧장 그친다. 알아듣는 이해력이 놀라울 정도다. 신통하기까지 하다. 어떻게 저렇게 어린 것이 어른이 하는 말을 알아 듣고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우리 집에서 온 식구가 하룻밤을 더 보내고 이튿날, 일요일엔 강남구 대치동 우성아파트로 갔다. 거기는 큰 손자네가 사는 곳이다. 14일이 큰손자 생일인데 행사를 며칠 앞당겨 일요일 날 하기로 했던 때문이다. 뽕뽕 타고 어디 간다 하면 어린 것도 신이 나는 모양이다. 바지를 가져와서는 한 가랑이에 두 다리를 꿰기도 한다. 양말을 찾아와 신겨 달라 하기도 하고 신을 거꾸로 신은 채 먼저 문간을 나서기도 한다.

큰 손자는 내가 정년퇴임을 하기 바로 전해인 2004년 10월 1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역시 원숭이 해인 甲申년 생이다. 그러고 보니 외손자와 큰손자 둘은 같은 원숭이 해에 태어났다. 열두 살 차이가 나는 소위 말하는 띠 동갑이 된다. 큰 손자가 태어났을 당시는 아직 내가 현직에 있었고 1년 반에 걸친 대장암 치료기간이 끝나기 전이었다. 그 때도 물론 녀석이 태어난 분당의 병원까지 불원천리 대구에서 서울까지 우리 내외는 조손간의 첫상봉을 위해 올라왔다.

내가 대장암 수술을 받은 때는 비가 유난히도 많았던 해인 2003년 여름 7월 18일이었다. 사람이 다 죽어가는 데도 7월 17일은 제헌절이 공휴일이라 쉬고 그 이튿날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쪽은 의사가 아니다. 의사들에게는 결코 환자의 생명이나 상태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의료윤리강령인 히포크라테스 선서(Hippocratic oath)에서도 의술은 인술(仁術)이어야 한다는데 그게 과연 그럴까. 겪어본 나는 안다.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행복하고 자유로울 수가 없다. 저승문턱까지 이르렀다가 퇴짜를 맞고 쫓겨난 목숨이니 삶에 무슨 미련이 있으랴. 그래서 하루하루를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큰손자가 태어난 다음해 인 2005년 2월 28일, 나는 40년 가까운 교직에서 물러났다. 1966년 3월 15일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중학교 전임강사로 시작된 나의 교직생활이 2005년 2월 28일 대구교육대학교를 마지막으로 마감이 된 것이다.

‘귀하는 평생을 2세 교육에 헌신봉사 함으로써 교육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대통령이 수여하는 황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다. 보람되고 좋은 평생직장을 준 국가에 대해 내가 감사해야 할 일이지 내가 잘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퇴임식이 있던 날 손자는 겨우 넉 달이 지난 때였다. 강보에 싸인 채 어미, 아비 품에 안겨 서울에서 대구까지 먼 길을 할아비의 대학 퇴임식장에 왔던 것이다. 녀석은 그 사실을 알 리 없다. 조상은 후손에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다는데 나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이런 하찮은 이야기들을 이렇게 하나하나 나열하는 걸 보면.

당시는 우리 내외는 대구에서 자주 상경할 기회가 없었다. 큰 손자는 지금까지도 외가에서 외조부모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란 터라 외가가 저희 집이다. 그에게 우리는 아직도 호칭이 ‘미국 할머니’요 ‘미국 할아버지’다. 그가 애기였을 당시 우리는 4년여 동안을 뉴욕에서 체류했기 때문이다. 자란 환경이 그랬으니 어린 아이의 그런 생각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언젠가는 “미국”이란 말이 우리들 호칭 앞에서 떨어질 날이 오겠지.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밝고 건강하게만 커주면 그보다 더 큰 복은 없겠다.

회사일로 영일(寧日)이 없이 피곤한 몸인데도 큰며느리는 아이 생일을 손수 준비하고 시어머니 시아버지에다 동서 가족까지를 부른 것이다. 그 맘 씀이가 기특하기 이를 데 없다. 아까 위에서는 작은 아기 칭찬을 먼저 했다만, 이젠 큰 아기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웬만해서는 자기들 식구 자랑은 하지 않는 편이 현명한 줄은 안다. “자랑 끝에 쉬 쓴다”는 옛말이 아니더라도 자랑을 좀 하고 나면 뒤에 반드시 후회스러운 일이 생기는 법이다. 그러나 이건 자랑이나 칭찬이 아니고 단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시어머니, 시아버지로서 당연히 알아주고 인정해줘야 할 미쁜 행실들이기에 소개하는 것뿐이다.

큰 아기는 예쁘고 영민하고 사근사근한 서울 아가씨으로 시집 온 지가 7년이 넘었다. 그들은 2003년 3월 2일 강남의 프리마호텔 예식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까지 우리 내외는 아직 한 번도 그 아이로 인해서 섭섭해하거나 속이 상해 본 적이 없다. 언제 보아도 언행이 한결 같다. 시어머니나 나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거나 언짢아하는 표정 짓는 걸 본 적이 없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사실이다. 어쩌면 행동거지가 그렇게도 예쁘고 상냥할 수가 있는가. 흔히 하는 말로 언제 보아도 연한 배 같다. 이래도 우리 내외를 복이 없는 노인네들이라 하겠는가.

나의 큰며느리는 전업주부가 아니고 개인 회사의 사장(CEO)이다. 서울의 중심부 강남의 요지에 사무실을 두고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무역회사 사장이다. 고객은 거의가 당연히 외국인들이다. 바이어들과의 상대는 물론 외국어로이다. 일본어는 그의 전공이라 우리말 못지 않게 능통하다. 영어도 그다지 지장은 없을 정도로 유창하고, 거래처가 중국에도 많다 보니 중국어까지 구사하는 실력파이다. 바쁜 가운데서도 이른 시간 학원을 나가기까지 해서 중국어까지 터득한 억척이다. 이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 애가 외국 바이어들을 상대로 통화하는 걸 수 차례 내가 가까이서 지켜보고 내린 결론이다. 해외출장이 잦은 건 물론이다. 술을 할 수가 없어서인지 골프로 손님들과 상담(商談)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단다. 그래서인지 골프 실력도 우리 가족팀 네 사람(나, 아들 둘, 그리고 며느리) 중에서 그 애가 현재로선 제일 낫다.

지난 추석 연휴 때는 홍천에 있는 비발디파크 리조트에서 두 아이들 가족과 우리내외 포함 여섯 식구가 3박 4일 동안 휴가를 즐길 수가 있었다. 특히 손자 둘이 신나게 잘 노는 모습이 그렇게 귀엽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거기는 세계 제일의 물놀이 시설을 자랑한다는 오션 월드(Ocean World)가 있고, 콘도라 타고 산 중턱까지 올라가 시작하는 경관이 뛰어난 골프장으로도 유명하다. 그 때 손자들과의 물놀이며 그 골프장에서의 라운딩이 참으로 좋았다. 세상이 참으로 좋아졌다. 시어머니는 물론 시아버지와도 같이 며느리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함께 물놀이를 즐기게까지 된 세상이니. 골프실력으로 말하자면 나야 말할 재비가 못 된다. 운동 삼아 그저 재미로 즐길 줄 아는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아기는 우리 집에 올 때면 언제나 여느 여염집 며느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소매 걷어붙이고 주방으로 향하는 모습이 더 없이 대견하다. 이런 며느리가 예쁘지 않고 어이리. 이건 지금까지의 그의 행적을 보고 우리가 내리는 결론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결코 자랑이 아니다. 불확실한 미래까지 지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집안이 되려면 새 사람이 잘 들어와야 한다는 옛말이 있던데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며느리 둘은 어디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예쁘고 착한 아이들이다. 동서간인 데도 흡사 자매 같다. 같이 있을 때면 둘 사이가 너무 좋아 보인다. 철없는 손자들도 큰엄마, 작은 엄마를 너무도 잘 따른다. 큰 아기는 작은 손자를 작은 아기는 큰 손자를 그렇게 예뻐해 줄 수가 없을 정도로 귀여워들 한다. 공교롭게도 두 사돈마저 학자요 교육자들이시다. 모두가 훌륭한 가정교육의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야 우리가 백 년을 그들과 함께 살 것도 아니다만 우선은 이들이 예쁘고 상냥해서 참으로 행복하다.

큰 손자는 얼굴도 귀엽게 잘 생겼거니와 행동이 민첩한 게 아주 마음에 쏙 든다. 사내 아이들이 대개 그렇다만 녀석은 그런 일반적인 정도가 아니다. 얼마나 설쳐대는지 정신이 없을 정도다. 잠시도 가만 있지를 못한다. 뛰어다니기 선수다. 아무래도 장차 기계체조나 텀블링 선수가 되려는가 보다. 할아비인 내가 어렸을 적에는 특히 그런 방면에 소질과 특기가 있었다. 그래서 대학진학 무렵에는 체육과를 택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아비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할아비인 나에게까지도 곧장 짓궂은 장난을 걸어오기도 한다.

조촐한 생일 파티를 마치고 나서 그 날 오후에는 며느리 둘만 집에 남고 다른 식구들은 모두 아파트 단지 놀이터로 나가 두어 시간 동안 바깥 가을 바람을 쏘이고 들어왔다. 손자들이랑 신나게 놀았다. 동생을 귀엽게 잘 데리고 노는 큰 손자가 참으로 대견하다. 인지상정이라더니 녀석도 천진난만한 동생이 그렇게도 귀여운가 보다. 얼마나 좋았던지 한번은 제 어미 보고 동생을 자기네 집으로 데려가면 안 되느냐고 물어보는 일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가 않았는데 이젠 자기가 아끼는 어떤 장난감이라도 다 동생이 만지고 가지고 노는 것을 허용할 만큼 대범해졌다. 저 어린 것들이 저렇게 서로가 좋아하는 사이로 자란다면 커서도 언제까지나 서로가 좋아할 사이로 발전될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리라. 두 놈이 신나게 노는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 내외는 참으로 행복했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같이 놀이터에 나온 다른 사람들도 우리 두 손자들의 노는 행동이 귀엽던지 부러워하는 눈치다. 이것이 우리 가족 본래의 모습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오늘만큼만 화목하고 정답게 지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소박한 바람마저 욕심이라 하겠는가.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 했던가. 두 며느리들은 신언서판(身言書判) 어디 한 군데 흠 잡을 데가 없다. 게다가 이렇게 떡두꺼비 같은 귀여운 손자들을 낳기까지 했으니 그보다 더 훌륭한 업적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들에게 이 시아비는 세상에서 제일 큰 상, 노벨효부상을 내린다. 얘들아, 너희 시부모는 지금 기꺼이 너희들에게 최고의 상을 내리는 바이니 사양 말고 받아라!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란 말에 얽힌 우스운 이야기가 하나 생각난다. 나의며느리들아! 너희는 다섯까지는 너무 힘들테니 둘만이라도 좋다. 왕자든 공주든 상관 말고 더 낳아야 하느니라. 명심하렸다!

어떤 며느리가 폐백을 드리다가 너무 힘이 들었던 때문인지 그만 방구를 뽕하고 뀌고 말았다. 새 며느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본 시아버지가 “얘야, 우리 집에 경사가 나겠구나. 전에 우리 어머니께서도 폐백을 드리시다가 방귀를 뀌셨다는데, 우리 5형제를 한 삼 줄에 주욱 뽑지 않으셨겠느냐. 그러니 너도 아들 5형제는 틀림없이 낳을 것이니 어찌 경사가 아니겠느냐.”며느리는 그 말씀이 어찌나 우습든지 웃음을 참는 바람에 그만 연달아 줄방귀를 뀌고 말았다. 그러자 시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아가, 그건 너무 과하구나. 아들 5형제면 족하지!“ 역시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진가 보다.

2010. 10. 11.

林谷齋/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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