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손자가 셋이다. 외손 하나에 친손이 둘이다. 외손자는 지금 미국에 있고 내년이면 대학에 들어가는 나이다. 친손자 큰 놈은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한다. 작은 놈은 지난 시월 8일 자로 19개월이 막 지났다. 아직은 손녀는 없다. 말 타면 종 거느리고 싶다(騎馬欲率奴:기마욕솔노)더니 이만하면 됐지 손녀까지 바라는 마음이 없지가 않는 건 왠 일일까. 사람 욕심은 끝이 없는가 보다. 이것도 금물인 노욕인가.

금상첨화격으로 내년 2011년 3월쯤 공주 손녀 안아볼 행복을 누릴 날이 멀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는 중이라 우리 내외는 요즘 신바람이 난다. 지금 세상에는 친손, 외손의 구분이 따로 있을 리가 없다. 커가는 과정에서 맘껏 사랑을 줄 수 있고 재롱을 꾸준히 지켜볼 수 있을 만큼 지근(至近) 거리에 있으면 어느 쪽이든 그 놈이 효손이다.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도 없다(Out of sight, out of mind)”. 자주 보아야 정이 난다는 말이 틀림이 없다.  할아비, 할미가 손주 보러 힘들게 먼 길 떠나는 수고를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되겠기에 그렇다.

지금은 키도 덩치도 할아비인 나보다 훌쩍 더 커버린 외손자는 우리 집에서 태어났다. 재주가 많고 영리한 동물인 원숭이의 해인 壬申년 1992년 12월 2일이다. 생애 처음으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우리 내외는 녀석을 극진히도 사랑했다. 외삼촌인 우리 아이들 둘의 사랑까지 보태서 녀석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을 게다. 나는 지금도 그 손자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난 사람이다”라고.

녀석이 태어날 무렵 얼마 전 나는 그렇게도 사람들이 어렵다고들 하는 즐겨 피우던 담배를 자진해서 끊기까지 했다. 아파트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해야 할 처지에 할아비가 독한 담배를 피운다는 건 갓난 아기의 위생에 너무도 가혹한 처사일 것임을 알았기에 그랬다. 녀석은 나에게 그 점에서 참으로 고마운 은인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 몹쓸 담배를 피워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 건강까지 지켜준 손자가 어디 있을까.

요즘 노인네들 사이에서는 손주보기 기피현상을 부추기는 듯한 풍조가 있다고들 한다. 손주 돌보다 보면 빨리 늙고 골병만 남는다나. 도대체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발상인가. 그런 한심한 생각을 하는 노인네들은 무얼 몰라도 한참 모르는 불행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고(思考)야 말로 하늘이 내리신 복을 내치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노년의 가장 큰 행복 가운데 하나가 손주 사랑인 것조차 모르는가. 어린 손주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젊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노인네들 두셋만 모여도 손주 자랑하고 싶어 안달인 것도 이를 반증하는 현상이다. 그렇게도 귀여운 자랑거리를 왜 굳이 외면해야 한단 말인가. 이야말로 이율배반적인 사고행태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는 지금부터라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사고에 일대 전환이 요구된다.

외손자를 처음 얻었을 때 우리 내외는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 내가 쉰 넷이고 아내는 마흔 여덟이었을 때니까. 지금에 비추어 돌이켜보면 아내는 그 때 아직 새파란 할머니였다. 우리 가족 모두는 녀석이 하도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당시 바로 아래층에 살던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에 의하면 밤에 자다가 애기가 울기라도 할라치면 이 방 저 방에서 자다 말고 온 식구가 일제히 일어나 애기가 자는 방으로 쿵쿵거리며 몰려가기도 했단다. 그래도 그 이웃은 불평 한 마디 없었고 우리들을 좋게까지 말해주었다니 그들이 우리보다 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틀림없었던 것 같다.

어디 그뿐이랴, 녀석이 태어난 이듬해 봄 온갖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던 화창한 어느 날, 생후 겨우 4개월밖에 안 되는 물 같이 어린 것을 것을 안고 팔공산 갓바위를 올라가기까지 한 일도 있었다. 아마 그렇게 어린 애기를 그 높은 팔공산 꼭대기까지 데리고 간 예가 그때까지 거의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다 나는 퇴근만 하면 어린 손자를 들쳐 안고 신이 나서 넓은 아파트 단지를 여기저기 안 돌아다닌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손자 안고 잘 다니는 젊은 할아버지로 소문이 자자하기까지 했단다. 우리는 그 때 당시로는 대구 시내에서 가장 명당이라는 수성구의‘신세계’아파트에서 살았다. 녀석이 좀 커서 손 잡고 걸을 만했을 무렵부터는 시내를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新川의 대봉교 바로 건너편 가까이에 있는 백화점에도 나는 손자와 자주 놀러를 가기도 했다.

옥상에는 훌륭한 놀이시설과 정원도 있고 해서 나는 손자를 데리고 비교적 자주 거기를 갔다. 그 백화점 단골 손님이 되어서 그랬던지 한가한 시간엔 점원 아가씨들이 우리가 나타나면 여기저기서 우르르 몰려오곤 했다. 물론 잘 생기고 귀여운 내 손자를 보기 위해서였다. 고슴도치도 원숭이도 새끼들은 다 그 어미에게는 원래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미가 아닌데도 내게는 내 손자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만 보였다. 백화점 아가씨들마저 사족을 못 쓸 정도로 녀석을 귀여워했으니 이건 나의 고슴도치식 편견만은 아니었을 게다. 청년이 다 된 지금도 녀석은 귀공자 타입에 귀엽기만 하다.

지난 금요일이다. 이 날은 한창 밉상꾸러기인 작은 손자가 생후 처음으로 어미, 아비 곁을 떠나 여기 안양으로 와서 우리와 같이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자주 오가는 터라 물론 여기가 그에게는 낯선 곳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미 예정된 일이라 우리 내외는 그 날 아침부터 손자 기다리느라 신이 나 마음이 들떠 있는 상태였다. 녀석을 오래 동안 못 보아서 그런 게 결코 아니다. 요즘은 일주일이 멀다 하고 자주 본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에게로 자주 찾아가기도 하지만 주말이면 대개 그들이 송도에서 이리로 오는 날도 잦다.

아무리 보아도 또 보고 싶고, 보고 있자면 그저 좋기만 한 존재가 손자다.
웃을 때만 좋은 게 아니라 울어도 좋고 떼를 써도 좋고 저지레를 해도 좋다. 응가를 해도 좋고 쉬를 할 때도 좋기만 하다. 잘 놀 때는 더 좋다. 녀석이 잠을 잘 때도 이 할아비는 그냥 있지 못한다. 몇 번을 자는 놈 옆에 가서 들여다본다. 잠을 잘 때면 온 방을 헤집고 다닌다. 여기서 자던 놈이 어느새 금방 저쪽 모퉁이로 굴러가 있다. 펴놓은 이불이며 깔아놓은 요때기는 녀석의 덤불링용 멧트다.

고사리 같은 손을 만져도 보고 통통한 다리도 만져보고 볼을 살짝 건드려도 본다. 사람 손이 어찌 그렇게도 아름다우랴. 발이며 이목구비며 배꼽이며 어디 하나 아름답지 않은 데가 없다. 장딴지나 볼기짝을 손끝으로 살짝살짝 쳐보면 연한 용수철처럼 통통 튀어오른다. 탄력 있는 피부란 바로 이런 애기들의 고운 피부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했던가. 누가 한 말인지는 몰라도 그 사람은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시인임에 틀림없다.

잠시라도 눈 앞에서 사라지고 나면 또 보고 싶어진다. 암튼 손자가 가고 나면 흔히 하는 시쳇말,“손자는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데 그게 과연 맞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안 오면 섭섭하고”가 맞다. 이 노릇을 어쩌랴.

그런데 사람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는 것인가. 아무리 퍼내고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게 사랑의 샘인가. 그 옛날 외손자를 키워 떠나 보내고 난 뒤 우리 내외에게는 십여 년 동안 손자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외손자 키울 때 녀석에게 우리는 우리가 가진 사랑을 송두리째 다 쏟아 부었기에 앞으로는 손주가 생긴다 해도 그땐 더 이상 줄 사랑은 없으리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다. 그건 하나의 기우에 불과했다. 주고 나면 사람의 가슴은 더 큰 사랑으로 채워지는가 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렇기에 나나 집사람에게는 지금 이 나이에도 어린 두 손자들이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하다. 지금뿐이 아니다. 앞으로도 나에게는 다른 손주들에게 줄 무궁무진한 사랑이 남아 있다. 그러니 며느리들아! 부디 귀여운 손주들 생산만 더 하여다오. 그것이 너희가 시어른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효도하는 길이니라.

손주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혼을 빼앗아가는 요정이요 천사인 게 분명하다. 평소 우리 집은 정적이 감도는 심산의 산사(山寺)이다. 적막강산(寂寞江山)이 근 백 년이란 말은 있더라만, 백 년은 너무하고 일 주일도 멀다. 두 노인네가 덤덤하게 그냥 있다가도 손자들 이야기만 나오면 멍청하던 눈에 생기가 돌고 가라앉았던 목소리 톤(tone)부터 달라진다. 마치 곁에 같이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녀석들 이야기를 신나게 연출한다. 이런 때는 연기 솜씨가 여느 탤런트 못지 않다. 살아 있는 연기를 한다는 말이다.

요즘 우리 내외에겐 지상 최대의 낙이 이 손자 녀석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다. 사람이 살다가 이런 큰 행복을 맞이하게 되는 때도 있는 것인가. 이런 행복은 어떤 다른 행복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소박하고 순수하고 값지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행복이 어디 나만의 것이랴만 그러나 세상 노인네가 다 이런 행복을 누리지는 못하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다수가 누리는 행복이라 하더라도 상관없다. 그렇지 못한 소수 편에 내가 끼이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얼마나 큰 복을 받은 노인네인가 말이다.

한시적인 일이었다만, 이 날도 할아비인 나는 모처럼 막중한(?) 용무가 있어 아침 일찍 외출했다가 저녁 늦게 돌아왔다. 전철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의 모 대학교에까지 임시 출근을 했던 것이다. 거시서 오늘까지 한 일주일 동안 수시모집 신입생 선발 위촉입학사정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귀가를 했던 것이다. 그 일 때문에 낮부터 손자랑 같이 놀 시간을 내지를 못해 종일 안달이 나있었던 상태였다.

전철역에 내리자마자 이내 택시를 타고 단숨에 집에 당도했다. 현관문을 열자 오전 일찍 왔다는 손자가‘할아버지 오신다’는 할머니 소리에 안에서 놀고 있다가 “할…”하며 부리나케 달려와 내 팔에 덥석 안긴다. 이 세상에 이렇게 반갑고 기쁘고 행복한 사람과의 만남의 순간이 또 어디 있을까. 이런 순간을 두고 죽도록 행복하다 해야 하는가. 조손(祖孫)간의 지고지순한 만남이여. 이 순간은 어린 그도 늙은 나도 그저 좋기만 하고 당당한 개선장군이 된 듯하다.

이토록 사랑스럽고 귀여운 사람이 늘 나의 귀가 길을 환영하고 맞이해주는 삶이라면 그건 분명 천국일 것이요 나는 더 이상 늙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성긴 머리카락, 쭈글쭈글한 얼굴에 수염 난 할아비, 다른 집 아이라면 분명 근처에도 오지 않을 몰골의 이 늙은이를 녀석은 왜 이토록 반길까. 번쩍 들어올려 비단결 같이 보드랍고 귀여운 그의 볼에 얼굴을 갖다 댔다. 고사리 손으로 할아비 얼굴을 만지며 어둔한 발음으로 ‘수엄, 수엄’하면서도 싫어하지는 않는 눈치다. 어린 것도 이렇게 자기를 좋아하는 할아비를 난처하게 하지 않는 배려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본능적인 혈육의 정 때문인가.

말이 그렇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미 곁을 떠나 따로 떨어져 기나긴 하룻밤 동안을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보내야 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과연 무사할까. 우린 놈의 점잖함을 믿는 구석이 없진 않다만 그래도 만약 울고 불고 자꾸 보채기라도 하는 돌발사태라도 발생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늙은이들로서는 속수무책일 게다.

애기에게는 그 어미가 땅이요 하늘이요 세상 전부다. 세상 어미들이여! 그대들은 정녕 엄숙하고 막중한 사명을 띤 소중한 존재임을 명심하소서. 그대들은 고귀한 생명을 잉태하고 인간으로 키워내어 세상을 세상 되게 하는 위대한 존재들이로다. 저 천진무구(天眞無垢)하고 까만 어린 천사들의 눈망울을 보라. 그대들은 그들의 생명줄이요 생명 관리자다. 그대들의 처신에 어찌 한 치의 소홀함이나 흐트러짐인들 허용이 되겠는가. 그대들은 분명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로다. 어린 애기에게 그 어미의 존재는 아비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애기들은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기에 잠시라도 어미 품이라는 울타리를 떠나면 마냥 불안해 한다.

우리는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은근이 걱정이 된다. 그런데 녀석에게 우리 내외는 요즘의 여느 할머니, 할아비와는 좀 다른 유대관계가 있다 할 수 있다. 우리가 작년 봄 뉴욕에서 귀국을 했을 때는 녀석이 태어난 지 겨우 40일이 되는 즈음이었다. 그 뒤 지난 봄 송도 신도시로 그들이 이사를 나가기까지 1년 가까이를 조손이 한 집에서 함께 뒹굴며 살았기에 하는 말이다.

그 결과 우리 내외에게는 지난날의 그런 생활에서 오는 은근한 믿음 같은 게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한 동안 용인 수지에 살 때는 연로하신 내 어머님이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셔서 4대가 한 아파트에서 수 개월을 같이 보낸 기간도 있었다. 어머니로서는 손부, 증손과 같이 한동안 생활을 하셨던 것이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으나 당시를 회상하면 요즘 세상에서는 체험하기 쉽지 않은 아름답고 값진 삶의 모습이 아니었나 하는 자부심 같은 게 우리 내외에게는 없지 않다.

특이나 나의 작은 며느리가 시조모님에게 보여준 그 때 그 아름다운 마음씨와 지극한 효성을 우리 내외는 결코 잊지 못한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서 먼 거리인 화성의 연금관리공단까지 가서 할머니 모실 휠체어를 빌려오기도 했고, 독립기념관이나 한강시민공원, 청계천, 국립중앙박물관, 서울대공원 등 어디 멀리 외출을 할 때면 나를 제치고 직접 휠체어를 밀고 다니며 할머님에게 여기저기 설명을 자상히 해드리기도 했다. 우리는 주로 한 식탁에서 같이 식사를 했는데 특별하고 색다른 음식이 있거나 할 경우 자기가 먹던 숟가락으로 그 음식을 떠서 할머니 입에 넣어드리기까지 하곤 했다.

나는 나의 두 눈으로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그 현장들을 똑똑히 목격했다. 요즘 세상에 이런 착한 손자며느리가 과연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당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애의 그 착하고 어진 행실에 나는 감격했고 할 말을 잊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살아오면서 특별히 선행을 한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착한 며느리를 얻었을 수 있었을까. 나는 한 때 사람 복(人福)이 없는 사람인가하고 생각해 본 적이 없지도 않았다만 그런 생각은 한낱 나의 억지에 지나지 않았음을 이제사 깨닫는다. 함께 한 세월이 비록 짧기는 했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다.

나의 어머님은 올해로 춘추가 아흔 여섯이시고 연세에 비해 건강하신 편이다. 지금도 자동차로 대구에서 서울, 부산, 포항까지 어디든 아들 딸들 집에 가기를 좋아하신다. 장거리 여행에도 조금도 힘들어 하지 않으신다. 서울에서 전화를 할 때면 나와 통화가 가능하다. 물론 큰 소리로는 해야 하지만. 고령으로 인한 자연 노쇠현상이야 어찌 없으시겠느냐만 아직 허리도 꼿꼿하시고 식사도 일정하시다.

자식인 나는 나의 어머니가 백세를 넘어 그 이상까지 누리시게 되기를 염원한다. 그래서 대통령이 하사한다는 청려장(靑藜杖)을 받으시게 되는 영광을 누리시게 되기를 바란다. 식구들에게마저 이런 나의 바람을 말하기도 한다만 속으론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다. 노모께서는 증손자를 특히나 귀여워하셨다. 그런 어머님에게 증손과도 함께 지내실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마련해 드릴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는 혼자만의 생각도 해 본적이 있다. 산책을 나갈 때면 나는 손자를 유모차에 태워 밀고 가고, 어머님은 지팡이를 짚으시고 가만가만 뒤따라 오시곤 했다. 지나가던 사람들 중에 더러는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 4대의 나들이를 유심히 바라보곤 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런 게 바로 사람 사는 이치요 순천(順天) 하는 길이 아닐까.

늦은 밤이 되자 잠의 요정이 녀석의 눈꺼풀에 깃들었는지 이불 깔아놓은 방바닥을 운동장 삼아 이리저리 뒹굴기 시작한다. 몇 차례, 엄마, 엄마하고 어미를 찾으면서 칭얼거리더니만 그냥 툭 군드러져 어느새 꿈나라로 가버린다. 일단은 성공이다. 참으로 기특하다. 볼수록 귀엽고 사랑스럽다. 어미가 옆에 없는 데도 어린 것이 안심하고 쉬 잠을 자다니. 할머니, 할아비를 믿어주는 정이 고맙다. 손자와의 사이에도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더 도타와지는 것인가. 일단 잠이 들더니만 아침까지 한번도 보채지 않고 내쳐 잘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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