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꾼 이윤기의 마지막 작품
이야기꾼은 가도 이야기는 남는다.
어떤 이야기꾼은 세상을 떠난 뒤 우리로 하여금 그가 미발표로 남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보게 한다.
지난달 27일 63세로 타계한 소설가 이윤기의 마지막 신간들이 내달
잇달아 나온다. 동인문학상 수상작가 이윤기는 100만부 넘게 팔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전 4권)를 남긴 신화(神話)학자였고,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등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였다.
세 가지 직업을 통칭하면 이야기꾼이 된다.
이야기꾼 이윤기의 유고(遺稿)는 세 가지다.
우선 웅진지식하우스에서 낼 ‘그리스 로마신화’ 제5권이다.
또 하나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번역이다.
전 9권 예정으로 번역할 계획이었지만 이윤기는 3권까지 딸 이다희와
공동 번역한 원고를 휴먼앤북스 출판사에 넘긴 뒤 타계했다.
평소 이윤기는 “서양의 무수히 많은 고사성어가 탄생한 과정을 담은 책”
이라며 완역을 다짐하곤 했다. 민음사에선 유고 소설집이 나온다.
이윤기는 마지막 원고뿐만 아니라 진짜 그의 일생을 건 최후의 작품도 남겼다.
그는 생전에 경기도 양평 작업실 주변에 ‘문필 노동’으로 번 돈으로 나무
1500 그루를 심었다.
3일장을 치른 뒤 한 줌의 재가 된 그는 그 나무들 밑에 묻힐 예정이었다.
그러나 폭우가 쏟아져 정상적으로 장례식을 치를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유족은 49재가 되는 날(10월 16일)로 수목장을 연기했다.
이날 그가 남긴 마지막 신간 헌정식도 있을 예정이다.
그가 일군 숲에서 그의 유골이 미발표 원고들과 합쳐져 일생(一生)이란
한 편의 작품을 빚어내게 됐다.
생전에 그는 단편 ‘봄날은 간다’를 통해 나무 심는 까닭을 밝히면서
“나무는 나의 재산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실존에 속할 것이다”고 했다.
2001년 어느 날 그의 작업실 부근에서 여섯 그루의 잣나무가 자연
발아(發芽)했다. 나무가 한 해 동안 5센티 크기로 자라는 과정을 지켜
보면서 그는 ‘시간의 눈금’을 발견했다.
1947년생인 그의 몸 또한 6•25, 4•19, 5•16, 월남전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새겨진 시간의 눈금이다.
그런데 그의 몸은 나무만큼 오래오래 눈금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조그만 ‘시간의 박물관’을 세우는 심정으로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나무 밑에는 그 해의 기록을 새긴 조그만 비석을 세우기로 했다.
이윤기는 소설에서 “중세 유럽에선 예수를 ‘아보르 비타에 크루치피크사에’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나무)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나무를 심으면서 슬프고 처연한 노래 ‘봄날은 간다’를 경쾌하게
흥얼거렸다. 봄날이 가듯 인생이 덧없다고 해도, 숲을 걷다 보면 시간에
저항할 필요없이 즐겁기에 ‘봄날은 간다’를 신나게 불렀다고 했다.
프랑스의 상상력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수직으로 뻗은 나무를 보면서
“오늘 우리에겐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불확실한 삶 속에서,
지하의 삶 속에서, 외로운 우리의 삶 속에서, 대기의 삶 속에서 느낀다”
라고 했다. 오래전부터 나무는 신성한 생명력을 상징해왔던 것이다.
생전에 이윤기는 “노래방이 생긴 뒤 한국인의 암기력이 떨어졌다”고 개탄했다.
그는 즉석에서 한 곡조 뽑아 흥(興)과 한(恨)을 번갈아 발산하길 즐겼다.
그의 호는 과인(過人:•지나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심은 나무는 ‘이 땅을 지나간 이야기꾼’의 일생을 오랫동안 흥얼거리지
않을까.
– 박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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