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은 살아 있다 / 김태익
집 근처 헌책방들을 둘러보는 데 맛 들이기 시작했다.
대학가인 서울 신촌에는 아직도 글벗서점•공씨책방•숨어있는책•
우리동네책방 등 듣기에도 정겨운 이름의 헌책방들이 꽤 남아 있다.
지난주에는 숨어있는책에 가 삼성가(家) 이맹희씨 회상록 ‘묻어둔 이야기’
(1993년), 프랑스 동물학자 이브 파칼레의 ‘걷는 행복'(2001년), 정연희의
1985년 소설 ‘난지도’ 등 8권을 샀다.
헌책방에 들어서면 평소 관심분야를 넘어 모든 책을 향한 식욕이 발동한다.
모두 합해 2만1000원. 젊은 주인이 거기서 2000원을 더 깎아준다.
헌책방 마니아인 번역가 이종인씨는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이 옆 친구에게
‘수서에 헌책방 생겼더라’ 하는 얘기만 듣고 수서 전역을 헤매 그 책방을 찾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틈나면 헌책방을 찾는 꾼들이 뜻밖에 많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 책 있어요?”가 아니라 “저기 꽂혀 있던 ○○○ 책 어디 갔어요?”
하고 묻는다. 인터넷서점의 매출액이 도서시장의 30%를 차지하고,
인터넷을 통하면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책을 10~30% 싸게 집에 앉아서 받아
볼 수 있는 시대다.
‘싼값’이란 것만으론 헌책방을 찾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어느 업종이라도 토•일요일까지 밤 10시 넘어 불 켜놓고 있는 집은
헌책방 말고는 드물다. 이건 그때 찾아오는 별난 손님이 있고,
그를 알아보는 별난 주인이 있어 가능하다.
헌책에 있는 책 주인의 사인, 밑줄, 메모는 그 책이 흘러온 내력을 알려주는
이력서다. 15년 전쯤 대학에 입학했을 새내기 중국문학도가 원서(原書)에
단정하게 깨알같이 적어내려 간 강독의 흔적들.
그것들은 잠시 잊고 살던 청춘 시절로 시간여행을 하게 해준다.
IMF 외환위기 때 망한 대기업의 자료실 도장이 찍힌 책이 흘러나온 걸
본 일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 책은 그 회사 창업주의 전기(傳記)였다.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떠나야 했던 직원들의 인생도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떠도는 책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는 저자가 내가 아는 사람에게 ‘○○○님 혜존’이라고 증정한 책이
겉장도 안 열어본 것 같은 상태로 헌책방에 나와 있는 것도 봤다.
받는 이의 비서의 실수로 책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결과라면 차라리
다행이겠다 싶었다.
해마다 4만 종 넘는 새책이 쏟아져 나온다.
이 중 대부분이 독자에게 기억될 틈도 없이 서점에서 사라진다.
대형서점의 좌판은 대중의 인기를 힘으로 한 책 간의 약육강식 전쟁터다.
헌책방은 일등이 아니라는 이유로 존재가 희미했던 책들에 보다 진중한 독자들의 선택을 받을 기회를 준다.
신간 서점에서는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던 책들이 헌책방에선
“나 여기 있소” 하고 얼굴을 내밀 때 독자는 말할 수 없는 발견의 희열을 느낀다.
헌책방 고수(高手)였던 출판기획가 고(故) 민병산씨는 헌책방에서 책이 움직이는 상황을 강물이 흐르는 것에 비유했다.
상류에서 요행히 나한테까지 떠내려온 책을 머뭇거리다 잡지 못하면
그 책은 나보다 하류에 지키고 선 누군가의 차지가 된다.
전자책 시대의 도래와 함께 ‘종이책의 죽음’을 얘기들 한다.
그러나 책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는 한 종이책은 살아 있다.
전자책의 미래도 결국 이 종이책의 운명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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