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을 때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았으니 여색을 조심해야 한다. 장성해서는 혈기가 굳세지니 싸움을 조심해야 한다. 늙어서는 혈기가 쇠약해졌으니 욕심을 조심해야 한다.” 공자가 말하는 ‘군자삼계(君子三戒)’다. 사람이 일생 동안 경계해야 할 것이 어찌 이 세가지뿐이랴마는 살면서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을 이보다 잘 요약할 순 없을 듯하다. 동서고금을 떠나 그렇다. 17세기 프랑스 풍자작가 라브뤼예르도 수필집 『성격론(Les
Caract<00E8>res)』에서 같은 얘기를 한다. “젊은 시절 쾌락을 좇고 장년기에 야심을 좇는 것과 마찬가지로 늙어서는 욕심에 빠져 있는 것이다.”

밝힘과 다툼, 탐냄 가운데 가장 위험한 건 마지막 것이다. 청•장년기의 실수는 노력에 따라 만회가 가능하지만 노년의 과욕은 평생 공들인 탑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만큼 치명적이다. 바로잡을 시간이 없기에 노욕은 필경 노추(老醜)로 산화하고 만다. 이상하리만큼 원로가 없는 우리 사회에 군내 나는 노추가 군무(群舞)를 춘다.

노추가 많은 곳은 오른쪽이다. 나이 들수록 보수 군살이 두꺼워지는 게 인지상정인지라 주름 잡힌 추함 역시 절대적으로 많다. 그렇다고 많은 예가-뭐 좋은 거라고-필요할 건 없겠다. 최근 것 하나면 족할 일이다. 사회 병리를 보면 참지 못하고 늘 “이게 뭡니까” 꾸짖어 인기 많던 교수님 말이다. 전임 대통령의 뇌물 스캔들에 또한 참지 못하고 “자살을 하든지 감옥에 가든지” 꾸짖었다가 홍역을 치른 그였다. 그만했어도 나았을 것을… “망령 난 노인”이라는 비난을 못 견뎌 “바지에 똥이라도 쌌느냐” 버럭 소리 지른다. 그의 호통이 예전만큼 힘이 없는 건 체력 때문만은 아니다. 차라리 노인성 치매 탓이었다면 연민이라도 낳았을 터다.
시를 300수나 외운다는 건강한 정신으로 목숨을 희롱하는 몹쓸 소리를 입에 담으니 욕을 먹었던 것이다. 사회의 어른답지 못한 말과 행동, 그걸 바로 노추라고 하는 거다.

수는 적어도 폭발력 있는 노추는 왼편에 있다.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 민란(民亂)을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거침없이 토해 낸다. “의로운 사람들이 죄 없이 죽고 수난 받는다”고 하고 “자유, 서민경제,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지키는 일에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한다. “독재자에게 아부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한다. “남조선 인민들은 파쑈통치를 쓸어버리기 위한 투쟁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지펴 올려라”는 북한의 신년 사설과 뭐가 다른지 귀를 의심할 소리들이다. 망언이지만 망령은 아니다. 우파에 정권을 넘겨주고 나서 일관된 주장을 하고 있는 그다. 연초에도 “광범위한 민주연합을 결성해 현 정권의 민주주의 역주행을 저지해야 한다”고 했고, 의사당 대신 거리에 나온 야당에 “잘하고 있다”고 격려한 그였다.

필생의 역작인 햇볕정책에 드리우는 먹구름을 보자니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북한이 지금 핵 보유국 행세를 할 수 있는 건 온 국민이 가슴 아프게도 그가 싸 들고 간 세금 덕분이었다. 북한의 커밍아웃으로 이미 명백해진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니 노욕이요, 내 눈 속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만 탓하니 노탐이며, 어떻게든 뒤집어보려 헛된 선동을 멈추지 않으니 노추인 거다.

노욕에는 좌우가 없다. 그저 추함만 있을 뿐이다. 가뜩이나 분열된 사회에 그런 쐐기가름은 범죄요, 죄악이다. 그들과 비슷한 연배의 시인 임강빈의 반성을 들려주고 싶다. ‘저울’이라는 시다.

“한번은 약국에 가서/
약 대신/
나를 달아보기로 했다/
욕심을 달아본다/
어지간히 버렸다 했는데/
노욕이 남아있어/
저울판이 크게 기운다/

양심은 어떨까 하다가/
살그머니 그만 내려놓았다/
두려움 때문이다/
저울판이 요동친다/
평형이 잡힐 때까지의/
긴 침묵/
외로운 시간이다.”

좌우 평형이 잡힐 때까지 입을 닫고 외로운 시간을 가져보란 말이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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