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맡을 피해서 어머니가 가만가만 베란다로 나가신다.

새벽이다.  꿈자리가 어지러운 밤이었다.
막다른 골목이었고 형체가 분명치 않은 무엇인가에 불안하게 쫓기고 있었다.
뒷덜미에 남아 있는 두려움을 떨치려고 바라본 어머니는 이미 세수를 마쳤다.

기력이 쇠잔해져 만사를 힘들어하는 아흔넷의 연세임에도 옛 여인의 법도가
몸에 배어 있다.
몸져눕지 않는 한 아침마다 베란다로 나가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세수를
하고 검은 머리 한 올 없는 백발을 찬찬히 빗는다.

‘오늘도 출근하느냐?’고 묻는 눈빛이 애처롭다.
어머니가 살아낸 세월은 출가외인이란 법도가 여자의 일생을 관통하던 시대였다.
출가하여 새로운 가문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낯설고 모진 시간
들이었으면 출가외인이라는 족쇄로 빗장을 질렀겠는가.

여자에게 친정은 떠나왔음에도 떠나올 수 없는 영원한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이 여인들을 살아 내게 했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푯대가 되어 앞만 보고 걷게 하였고 튼튼한 가문을 이루게 한 원동력
이자 자존감이었다.

여느 여인들처럼 어머니의 삶도 질곡(桎梏)의 세월이었지만 그 모든 것은 잦아들고
지금은 가느초롬한 어깨가 박꽃처럼 애잔하다.
허리를 다치고 일 년을 누워서 지내는 동안 쪽진 머리는 잘려 나갔고 일어
서지를 못한 이후 어머니는 정물(靜物)에 가깝다.

어떠한 일도 마다해 본 적이 없는 손이었지만 지금은 푸른 정맥만 선명할 뿐
소일거리가 없다.
어머니가 혼례를 올린 그 해, 같은 문중으로 시집온 여덟 명의 규수가 문중의
규범을 익히면서 서로를 꽃에 비유했는데 어머니는 목단화였다.

솜털이 채 가시지 않았을 열일고여덟의 새색시들이 모여 앉아 서로의 품성과
자태를 꽃의 이미지로 비유한 것도 놀랍지만 花中 王이라는 모란이
내 어머니의 꽃이었다는 것에 눈시울이 젖어 온다.
유장(悠長)한 세월은 그 아리따운 새색시를 백발의 언덕에 무심히 부려놓은 것이다.

한 생이 잠깐이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 있던 계집아이가 부표처럼 떠오른다.
그때는 어머니의 등이 세상의 넓이였는데 가랑잎 같은 어머니는 이제 딸의
등이 세상의 넓이다.

환한 달밤, 병중에 계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논물을 대러 가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질척거리는 들길을 걸으면 조그만 돌부리에도 넘어지곤 했다.
들판을 가로지르며 콸콸 흘러가는 봇도랑의 물살은 장정(壯丁)도 빨려 들어갈
정도로 거셌다.

물길은 춤추고 아우성치며 아득한 들판을 유유히 적셔 나가지만 봇도랑과
멀리 떨어진 논에는 늘 물길이 약했다.
모심는 날은 내일인데 논물이 더디게 흘러들자 어머니는 봇도랑에 엎드렸다.
물살을 조절하기 위해 걸쳐 놓은 짚단을 걷어내기 위해서였다.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물길이 달빛에 구불거렸다.
나는 어머니의 몸이 빨려 들어갈세라 허리를 잡고 버둥거렸다.
간신히 짚단을 걷어내고 봇둑에 앉은 어머니는 “달도 밝다.” 나지막이 중얼
거리며 두려움에 뻣뻣해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옆에 서면 세상에 겁날 것이 없었다.
지금도 달이 환하면 아득한 슬픔이 가슴에 차오른다.
집 밖을 나서면 휠체어에 앉아서도 넘어질세라 딸의 손을 꽉 움켜잡지만,
어머니를 의지하는 내 마음은 아직도 봇도랑에 앉아 달빛에 젖어들던 그
밤처럼 오롯이 남아 있다.

혼자 남겨질 노인은 생업의 현장으로 출근하는 딸의 부산한 움직임을
고즈넉이 건너다본다.
간간이 눈길이 마주치고 모녀는 흔연스럽게 미소를 나누지만 서로의 속내는
짐짓 모른 체한다.

일찍 오느냐는 한 마디를 끝내 입안에 감추는 어머니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면서도 딸은 일찍 온다는 답을 선뜻 내놓지 못한다.
겪어 보지 않은 삶이 가늠될까.
노인이 되어보지 않고서야 그 심정을 낱낱이 헤아리기는 어렵다.

딸의 발걸음이 멀어지고 나면 집안은 먼지 한 톨의 움직임도 포착되는 적막이
감돌 것이지만 어머니는 내색을 않는다.
모녀간이라 하여도 소통이 완전할 것인가.
무심히 지나쳐가는 미진(未盡)한 구석이 허다함에도 딸의 마음을 먼저 품어 안는 모성이다.

쓰임새가 적은 무명실을 사오라고 할 때마다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다.
나무젓가락 양 끝에 빨간 천을 덧대어 실패를 만들어놓고 나날이 기다리는
눈치가 등을 떠밀 때쯤이라야 마지못해 사 온다.
방바닥에 둥글게 타래를 펴 놓고 실오리를 풀어내자 대각선의 결을 이루며
도톰하게 감겨 가던 실꾸리,

그것은 삶과의 교감이었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교직(交織)이었다.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하 많은 삶의 곡절이 한 뼘으로 접혀져 버린 어머니의
시간을, 그 하얀 삶의 경전(經典)을, 톱니바퀴같이 맞물린 일상을 뒤쫓느라
허둥대는 딸은 아직 다 읽어 내지 못한다.

쓸쓸함을 감춘 채, 잘 다녀오라고 밝게 배웅해 주는 짤막한 한 마디가 등에
서늘히 부딪는다.
저 애틋한 음성을 언제까지 들을 수 있을까.
슬픔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온다.

산다는 것은 인연의 매듭을 엮어가다가 매듭은 다시 풀리고,
종내는 혼자 돌아가는 것이다.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은 어머니를 잃을까 근심하는 불안감이었다.
예견하고 준비해도 이별은 찰나(刹那)다.

운명의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그 캄캄한 작별 후,
남은 자가 할 수 있는 행위는 고작 울음뿐이다.

종종걸음을 치던 발길을 불안한 마음이 돌려세운다.
현관문을 다시 열고 일찍 온다고 크게 소리친다.
어머니가 환하게 웃는다.

 

-이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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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5. 30.

林谷齋/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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