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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

소아시아 지역인 아나톨리아의 기독교 유적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들 중 하나로 터키 동부,  지금의 시리아 국경 근처이고 오곤테스 강가에 위치한, 지금은 안타키아(Antakya)로 부르는 안디옥(Antioch)이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통합하기 위한 대 전략으로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안디옥은 주요한 곳이었다.  그 후 크리스챤들이 들어 올 때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시리아 지역의 수도였고 로마의 동부 군사력 기지였다.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하여 뿔뿔이 흩어지면서 수많은 무리들이 안디옥으로 피신하였다.   그리하여 자연히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안디옥에서 그들을 처음으로 크리스챤이라고 불렀다.  사도들의 전도에서 그들을 도울 명망이 있는 일곱사람들을 뽑을 때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뽑아…”라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이곳 출신이다.

바울, 베드로 그리고 바나바가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안디옥의 유대회당에서는 예루살렘에 있던 회당처럼 보수적이지 않아 안식일에 그리스어 구약성서인 70인 번역서를 사용했고 그리스어로 예배를 드릴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때문에 크리스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안디옥에서 부터 퍼지기 시작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안디옥으로 가는 도로변엔 커다란 양파자루들을 줄줄이 걸어놓고, 헤즐넛이나  그 지역에서 유명한 무화과열매들을 진열해 놓고 팔고 있었다.  그 곳에서 샀던 무화과 열매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어디서든지 달러를 받았는데 시골이라 1불에 한 보따리였다.  너무 잘 익어 껍질을 얇게 벗겨 먹으면 싱그러운 향내가 입안에 번져 눈이 스르르 감기는 것 만 같았다.  무화과는 말 그대로 꽃 없이 열매를 맺는 과일이라고 하여 처녀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였다는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고 한다.

터키에서는 필름이나 현상값이 비싸고 사진기가 귀해서 카메라만 보면 만나는 사람마다 쫓아다니며 서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졸라댄다.  주소를 적어주며 꼭 사진을 부쳐주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부탁한다.

또 한 곳으로는 바울이 태어난 다소(Tarsus)를 빼놓을 수가 없다.  다소의 역사는 기원전 3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지방의 전설에 의하면 아담의 아들 셋(Seth)으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한번도 도시가 버려지지 않았고 전쟁과 오랜 세월로 많이 파괴되었지만 옛 도시의 잔재들은 현재의 도시 10~65 미터 아래에 있다고 한다.  다소는 세상에서 고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해 오던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다소로 들어오려면 상인들이나 군대가 험한 협곡을 통과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통로였던 북부 산악지역을 거쳐 처음으로 씰리시안 문(Cilician Gate)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문이라고 부르는 유적이 다소시 입구에 있는데, 클레오파트라가 마크 안토니오를 이곳 다소에서 만나 그를 유혹했던 곳이기도 하였고 이곳에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운다는데, 사실상 클레오파트라와 이 문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

기원전 41년에 마크 안토니오는 빌립보에서의 승리로 반대편을 도왔던 이집트의 여왕을 혼내 주려고 다소에서 별렀었다.   그리스의 역사가였고 영웅전 작가로 유명했던 플루타크(Plutarch, 46?~120?)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의 도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금을 입힌 고물로 된 유람선은  자줏빛 돛을 달고 플룻, 피리와 거문고를 타면서 은으로 만든 노를 저으며 시드누스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데 큐피트로 분장한 소년들이 그녀의 양 옆에서 부채질을 하는동안 금으로 반짝거리는 차일 밑에 클레오파트라는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와 같은 옷을 입고서 비스듬이 누워있었다.”   안토니오는 너무 매혹되어서 그녀를 꾸짖는 것도 잊어버렸을 뿐 만 아니라 아나톨리아의 광대한 해안지역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뒤에  다소(Tarsus)에서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눈이 멀게 되었고 예수를 만나게 된 유대인으로 로마 시민권이 있었으며 천막을 만드는 직업을 가진 사울이 태어난다.

오래 된 다소의 좁은 거리를 걸어 들어가면 사도 바울의 우물이 나오고 그 옆에  수 미터 깊게 파여진 곳에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새겨진 옛 집터를 플라스틱 유리를 통해 볼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의 부모는 천막 만드는 직업을 가져서 비교적 부유했을 것이라고 한다.  로마군인들의 막사를 짓는 텐트용 천막도 있지만,  카펱도 만드는데 사실 그 곳 사람들은 카펱으로 천장, 바닥과 벽을 장식하며 큰 재산목록이 되어서 지금도 여자들은 카펱을 짜서 결혼지참금과 생활비를 번다.  현재의 사도 바울의 터도 확실하게 그의 집이라는 증거는 없지만  그 당시의 우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장 근접하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부자들만 우물을 가지고 있어서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이 부잣집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고 하니 그들의 생활 중심이 되었으리라 짐작해 보았다.  지금도 두레박으로 퍼올려지는 그 물을 마셔보니 아주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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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 입구에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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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를 향해서 왼쪽에 위치한 언덕 모습.  사도들과 교인들이 이곳에서 기도하진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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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설교 하였다는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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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 밖에서 더위를 식히며 마고와 그녀의 부모 그리고 여행 안내자와 함께 앉아 있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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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 앞에서 우리 일행과 안디옥 교회를 지키는 관리인(빨간옷)과 함께 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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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시안 문 지도(Cilician Gates Map).  서부에서 다소를 가려면 험하지만 아름다운 타우러스 산맥(Taurus Mountains)을 넘는데 특이한 지형과 아름다움으로 여행객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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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시안 문(Cilician Gates).  현재 터키어로는 귈렉 보가지(Gülek Bogazi)라고 하는데, 이 사진 맨 오른쪽 팻말에 씌어 있다.  이 문은 타우러스 산맥에 있는데 다소(Cilician Plain)와 아나톨리아 고원지대(Anatolian highland-Iconium)를 지나려면 꼭 통과해야 하는 문들이다.  페르시아가 이 문을 통과하였고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그리스군대도 지나야 했다.  사도 바울도 두번째와 세번째 전도여행에 이 지역을 통과하여야만 하였다. 실리시안 문은 다소에서 북쪽에 있는 27.5mi.(44km)의 길로 매우 중요한 전략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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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으로 가던 도로변에 양파를 펼쳐놓고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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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트럭으로 양파를 실고 와서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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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의 상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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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의 상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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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서 파는 무화과 열매.  무척 단 냄새에 벌이 달려들 정도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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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의 입구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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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Tarsus) 마을.  바울의 우물로 가는 길에 찍은 마을 풍경으로 좁다란 골목에 오래된 집들이 촘촘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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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에 있는 바울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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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에 있는 바울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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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에 있는 바울의 우물 바로 옆에 바울의 집이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그 당시의 집안 모습.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어 그 당시 상당히 부유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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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에 있는 바울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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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에 있는 바울의 우물.  바울의 집터로 추측되는 유리 덮힌 모습이 오른 쪽에 약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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