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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 즉 소아시아에 있던 초기 크리스챤들은 박해를 피해 인적이 드물고 멀리 떨어진 터키 중부 지방에 있는 카파도키아(Cappadocia)로 가서 살기도 했다.   카파도키아는 6천만년 전에 주변의 화산 활동으로 인해 생긴 것인데 처음 화산의 활동 후에 지역적인 침식이 생겼고 그 후에 일어난 화산으로 인해 용암, 화산재 그리고 응회암이 서서히 침전하면서 전에 형성되어 있던 언덕과 골짜기들을 뒤덮어 전 지역이 신비스럽기 그지없는 고원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융기된 이유는 바람과 강과 비가 이유라고 하는데  기온의 급강하와 산의 눈이 녹아 내려와 그런 특이한 모습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곳에 있을 때 정말 하루종일 맑고 덥고 바람부는 전형적인 사막의 여름날씨였는데 저녁부터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날씨가 무척 변덕스럽다고 해서 숙소에 부지런히 돌아왔는데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밖을 내다보니 포장되지 않은 길들이 삽시간에 누런 흙탕물로 변해 무섭게 쓸려 내려가고 있었다.  캄캄한 밤에 천둥은 무섭게 치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엔 제법 큰 가로수마저 바람에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튀는 소리가 들려서 살짝 창문을 열고보니  비에 섞여 조그만 얼음덩어리들이 쏟아지지 않은가?  삭막하고 황량한 사막의 괴이한 자연현상을 보고  놀랍기만 했다.

이런 척박한 곳에 믿음을 지키려고 와서 숨어서 살았을 초기 크리스챤들의 모습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높이 솟은 이상한 돌기둥이나 기괴한 암석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방들을 연결해서 만들어 살았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주거지도 있지만  수도원과 교회도 천여개나 있으며 성화가 그려진 동굴교회가 15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슬람 세력이 들어오면서 손에 닿는 성화 부분은 많이 지워져 버렸고 윗부분도 얼굴부분 같은 곳이 많이 뭉개져 있었다.

이 곳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지하도시들이다.  돌들은 화산석이라서 그 속을 파는 것이 비교적 용이하겠지만 사람들이 일일이 쪼아서 파 내려가야 했을테니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땅 밑으로 20층이나 되는 지하 도시도 있는데, 위급할 때 그 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입구 부근에는 짐승들을 놔두는 곳이 있고, 곡물을 저장하던 곳도 있었다.  지하굴들은 밖에서는 열 수 없는 커다란 맷돌같은 둥근 돌들을 굴려 중간 중간 입구들이 막히게 되어 있었고, 밖에선 우물같은데 내려가 보면 공기통이어서 그 당시에 숨 죽이며 살던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우연히 발견된 지하처소가 많은데 지금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도 많을 것이라고 한다.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환란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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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마고의 아버지가 낙타같이 생긴 바위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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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도키아에서 민속복장을 파는 상인이 이곳에 오면 꼭 한번 입어 보아야 한다면서 내 머리에 씌어주었다.  그런 후 자신도 우스웠던지 킥킥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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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터키의 안탈리아에 있는 아크데니즈 대학 농대교수로 있는 페레무즈 외즈데미르 박사를 만났는데 아내와 세 딸과 함께 여행 중이었다.  여느 터키 여인들처럼 뒤에서 말없이 따라오는 그의 아내와는 달리 세 딸들은 무척 상냥했고 사랑스러웠다.  외즈데미르 교수는 유창한 영어로 친절하게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해주었다.

터키인들의 한국인들에 대한 감정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축구이야기만 나오면 웃음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들을 진심으로 대해준 사람들이 한국인들이었다며 그들이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데쉐키르 에데림(터키어로 고맙다는 뜻)을 연발했다.  그래서 몇 마디 외었던 카르데쉬(터키어로 형제) 를 써먹으며 엄지 손을 들어보였다.  여행 끝에 집에 와보니 월드컵에 대한 외즈데미르 교수가 보낸 장문의 감상문이 이메일로 와 있었다.  끝에는 우리의 형제국인 한국인을 만나 너무 기쁘고 내가 뉴욕에서 살고있어 더욱 기쁘다면서 미국에 사는 한국인을 친구로 갖게된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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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을 때 뒤에서 머뭇거리는 교수의 아내를 팔을 끌다시피 해서 함께 동참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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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첫째 딸이 얼른 사진 찍자며 옆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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