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데 교회. 아르테미스 신전 뒷편에 있는 이 작은 교회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졌으며 대략 1세기 중반에 사데 교회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사도 바울의 제자이며 일곱 집사 중 하나였던 클레멘트가 사데 교회의 첫 감독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서부지역에 위치한 사데는 현재 사르트(Sart)라고 불리우는데 서머나에서 60 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비옥해서 주위에 펼쳐지는 잘 개간된 농토의 풍경이 무늬져서 눈에 들어온다. 사데는 기원전 13세기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으로 거의 서부 아나톨리아 전 지역을 차지했던 옛 왕국인 리디아(the Lydian Empire)의 수도였으며 고대에 가장 위대한 왕국 중 하나로 중심지였다.
리디아에는 아주 이상한 풍습이 있어서 소녀들이 결혼지참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몸을 파는 행위도 묵인이 되었다고 한다. 초기에 리디아의 왕이었던 칸다울레스(Candaules)는 그의 호위병이었던 기게스(Gyges)에게 자신의 아름다운 왕비의 벗은 모습을 보도록 하였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왕비는 기게스에게 죽음을 택하든지 그녀의 남편을 죽이든지 한가지를 택하라고 조건을 내걸었다. 왕비와 결혼한 기게스는 리디아의 유명한 왕 크로에수스(Croesus, 560~546 BC)의 조상이 되었다.
리디아의 마지막 왕이었던 크로에수스는 에베소에 있던 아르테미스 신전을 호화롭게 꾸미도록 적어도 10톤의 금을 헌납했다고 한다. 그 신전은 기원전 580년에 아르테미스의 여신을 위해 지은 것인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그래서 크로에수스같이 부자(rich as Croesus)라는 표현이 생겨났다는데 지금도 그런 표현을 쓴다고 한다.
리디안 왕국은 기원전 546년에 페르시아(바벨론)의 키루스(Cyrus) 황제에게 패하여 크로에수스가 그의 사데 성에서 붙잡힘으로 종말을 맞게 된다. 크로에수스와 키루스의 싸움에서 키루스가 첫번째 전쟁에서 이겼는데 동부 아시아지역의 장군들이나 생각해 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이용하였다. 그는 말이 낙타를 몹시 싫어 하고 그의 냄새도 무척 역겨워 한다는 것을 알고 크로에수스가 배치한 전열 앞에 부대에 넣었던 낙타들을 풀어 놓았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서 크로에수스의 말들이 혼비백산하는 동안 그의 기병대들을 공격하여 놀라 날뛰는 말에서 내린 군인들은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요새 안으로 줄행랑을 치게되었던 것이다.
그 후 14일 동안이나 페르시아 군대가 밖에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키루스가 누구든 첫번째로 리디아의 요새를 올라가는 자에게는 포상을 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우연히 리디안 군인 한 명이 헬멧을 요새의 벽 아래로 떨어뜨렸는데 그것을 주으려고 바위를 타고 내려와 다시 주워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를 보았던 페르시안 한명이 군인들을 데리고 다음날 칠흙같은 밤중에 조심스럽게 그와같은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타고 올라가 리디안들이 난공불락으로 여겼던 요새를 점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크로에수스의 통치가 끝나고 페르시안에게 넘어가게 된 것이다.
구약성경 오바댜의 예언 20절에 나오는 세파라드 (Sepharad)가 사데(Sardis)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여긴다는데 사데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586 BC)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거나, 바빌론의 느브갓네살 (Nebuchanezzar) 왕 때에 지휘관이었던 느브사라단 (Nebuzaradan, 왕하 25:11-12) 에 의해 리디아에 팔리운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열왕기하( 24:10~16)에 느브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과, 관리와 용사 만 명 뿐만 아니라, 모든 기술자와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갔다. 그래서 그 땅에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 말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라며 그 때의 상황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기원전 720년 경에 희브리의 대 예언자였던 이사야는 구약성경 이사야 45장에 하나님의 도구 키루스 황제에 대한 예언에서 “어둡고 은밀한 곳에 감추어진 재물과 보화를 너에게 주어서…” 라고 표현되어 있다. 키루스 황제는 사데를 정복하고 난 후 기원전 538년에 망명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고 두번째 성전을 짓도록 하였다. 그 후 사데는 알렉산더 대왕 때까지 약 2백여년간 페르시아의 관활구에 속하였다.
크로에수스에 대한 수많은 일들이 전해지는 것은 아마도 프리지아인(Phrygian)이었던 이야기꾼인 이솝(Aesop)이 그 당시 사데에서 살았었고 크로에수스의 궁전 뜰안에서 기거했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 이미 왕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회자되었던 것이 한가지 이유가 될 것이라고 한다.
사데에 흐르는 팍톨루스 냇물(Pactolus stream)은 흘러흘러서 사데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곳으로 흐르는데 이 냇물에서 금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웅덩이에 양피를 깔고 무수한 금조각들을 건졌다고 한다. 미다스가 상류에서 목욕을 할 때 그의 황금손(Midas’s “golden touch”)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남서쪽으로 얼마 안가서 팩톨루스 냇물 근처에서 최근에 사데의 금제련소가 발견되었다. 로마제국이 이곳을 통치하던 기원전 2세기에는 이미 냇물의 금들이 고갈된 상태였다.
크로에수스의 아버지인 알리아테스(Alyattes)왕은 금은 합금으로 최초의 동전을 만들어 통용했고 크로에수스는 나라에서 액면가격으로 인정하는 순금과 순은으로 동전을 만들어 효율적인 상거래를 가능케 했다. 리디아 사람들은 7줄의 수금과 주사위 놀이도 발명하였다. 로마의 시인이었언 오비디우스(Ovidius, 43 BC ~ AD 17 ?)의 변형(Metamorphosis)에는 사데의 부근에 있는 트몰루스산(Mt. Tmolus)을 의인화 해서 아폴로(Apollo)와 판(Pan) 사이에 음악으로 경쟁하였을 때 트몰루스가 심판을 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데의 옛 주요 도로엔 각가지 상점터들이 길다랗게 빛바란 채 늘어서 있었고, 북쪽에 기원후 2세기때 지어졌다는 웅장했을 고대 체육관 시설과 앞 부분엔 유명한 대리석 뜰이 있고, 그 뒷 부분엔 훌륭했을 목욕장 터가 있다. 그 옆엔 긴 유대회당이 달려있다. 원래 체육관 시설물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 기원후 2세기에 회당이 되었다고 하는데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중에서 가장 큰 회당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프레스코 벽화와 대리석 모자이크는 유대인들이 매우 안정되고 부유한 삶을 살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데에서 가장 웅장한 그리스의 이오니아식 건축물인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원전 550년경 부터 짓기 시작해서 기원전 334년에 완성된 후 여러번 재건축하다가 기원후 150년에 길이가 100m에 넓이가 50m에 이르는 육중한 규모의 건축물이 되었다. 지금은 폐허가 되다시피 되었는데도 그 규모가 여전히 어마어마했다. 그곳에 갔을 때 미국의 지원금으로 어느 미국 대학교에서 고고학자와 학생들이 발굴하고 있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남동쪽 한 구석에는 기원후 4세기경에 지어졌다는 자그마한 비쟌틴 교회가 거의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사데에는 여러 교회가 페허로 남아있는데, 이 교회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교회 ‘M’이라고 불리우고 장례를 위한 예배당이었다고 한다.
사데 교회의 기간은 16세기 초부터 18세기 말엽으로 본다. 요한계시록에는 사데 교회(계 3:1-6)에 대하여 이렇게 씌어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 나는 네 행위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아마도 사데 교회가 오늘날의 큰 교회들처럼 부유하고 활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외적인 것하고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내적인 실상과는 부합되지 않음을 일깨운다. “그러나 사데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이 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인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기는 사람은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소수의 흰 옷을 입음은 의롭게 여김을 받고 영생을 얻음을 의미할 것이다.
사데 교회 내부 모습.
사데 교회 내부 모습.
사데 교회 밖에서. 친구 마고의 아버지가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 기둥과 사람이 비교된다. 기둥 하나도 엄청나게 컸다.
사데 교회 내부 모습. 잡초만 나있어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아르테미스 신전. 돌기둥의 두께가 엄청났다.
아르테미스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 이 신전은 BC 335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재건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가장 큰 신전 중 하나로 크기가 대략 100 미터에 50 미터나 된다고 한다.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미국 대학에서 온 역사학자들이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아르테미스 신전. 뒤에 보이는 산이 흥미로웠다.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층으로 지어진 종합 체육관. 현대식 건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체육관.
체육관.
체육관. 섬세하게 새겨진 건축물.
기원 후 3세기에 세워졌다는 유대인 회당.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모자이크 된 한쪽 벽이 거의 원형 상태로 남아있다.
유대인 회당 자리에 있는 십자가가 새겨진 물통.
유대인 회당.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큰 회당이라고 한다.
유대 회당 바닥에 아름답게 장식된 모자이크.
유대인 회당.
호텔 앞 화분에 심겨진 채송화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한국의 채송화보다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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