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폴리캅 교회 내부의 성화.
서머나를 지금은 이즈미르(Izmir)라고 부르고 있는데 에베소에서 40마일 북쪽으로 떨어진 이곳은 지리 적인 잇점과 온화한 기후로 터키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이며 수출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처음 정착은 에게해에 면한 조그만 반도를 중심으로 기원전 25세기 경 부터 살았으며 기원전 9세기경에 이오니아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아나톨리아의 북동부지역에서 중요한 중심지로 자랐다. 그 후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이 옮겨와 파구스 산 언덕위에 성을 짓고 정착하면서 그 이름을 서머나라고 하였고 로마에서 인도와 페르시아로 가는 무역도시였다.
서머나는 버가모(Pergamum)왕국의 일부이기도 했는데 기원전 190년에 서머나의 아타루스 3세(Attalus III)가 죽으면서 그의 아들이 그 지역을 다스리는데 적합한 인물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로마에게 주라고 유언을 했다. 로마가 다스리면서 평화와 번영이 시작 되었다. 그 당시 왕은 이미 자신의 아들은 너무 약하고 로마는 도저히 이길수 없는 대세로 알지 않았을까?
서머나에는 초기 크리스챤시대에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처음 교회가 생긴 곳 중에 하나다. 동로마시대의 서머나는 상업이 매우 발달하여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블)을 앞질렀었다. 11세기 초엔 셀쥭 터키가 도시를 점령하였고 몽골이 점령하였다가 1415년에 오스만 터키(Ottomans)가 점령하였다. 오스만 터키 시대에도 서머나를 그리스 정교회가 대부분 지배하고 있었다. 서머나는 콘스탄티노플과 마찬가지로 실크로드의 정착지였기 때문에 부유한 상업지였고 도시생활을 즐길 수 있던 도시이기도 했다.
20세기 초에 피비린내가 나는 전투에 수 많은 그리스인들이 죽었으며 세계 1차대전이 끝나면서 터키가 그 지역을 그리스로 부터 넘겨 받게되어 1922년에 그리스는 아나톨리아에 있던 그리스 군대를 결사적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923년에는 그리스에 살던 터키인들과 아나톨리아에 살던 그리스인들의 교환이 있었는데 그 일로 인해 인구 분포가 급변하게 되었다. 지금의 서머나는 그리스인들의 부유했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구가 줄었다.
터키에서 국부(國父)가 된 무스타파 케말이 먼저 유럽 쪽 지역을 쳐들어 가서 감싸 안듯이 다시 아나톨리아 지역을 점령하여서 그리스는 거의 모든 기름진 땅들을 잃게 되었고 그 대신 에게해에 있는 모든 섬들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한 터키인은 불만 썪인 어조로 터키 땅에서 소리 지르면 곧 들리는 곳에 있을 정도로 바로 코 앞에 있는 섬들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 것이 될 수 있느냐고 못마땅해 했다. 터키 땅에는 조상 대대로 로마, 그리스 사람들이 살아왔던 곳인데 말이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쓴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머(Homer)가 이곳 서머나의 멜레스(Meles)강 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또한 그 곳에서 멀지 않은 키오스(Chios)섬도 호머의 고향이라고 주장한다.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념하여 세운 신전이 있어 그 곳에서 황제 숭배가 행해졌는데 크리스챤들이 황제에 대한 예배를 거부함으로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굴하지 않아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유일하게 칭찬을 받은 교회이다.
동부 로마제국의 지배하에서 서머나는 상업의 중심지로 지금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 보다 앞질렀을 정도여서 대리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신전과 공공건물들이 많았는데 잦은 지진으로 인해 거의 손실이 되어 없어졌다.
서머나는 2세기에 들어오면서 감독을 가질만큼 교회가 성장하였다. 초기 크리스챤으로 또한 서머나의 4대 감독이었던 폴리캅(Polycap, AD 69-155)은 최초의 순교자로 유명하다. 폴리캅이 붙잡혀서 경기장에 끌려와서 로마황제를 섬기라고 회유하는 집정관의 말에 오히려 잘 들으라면서 “나는 크리스챤입니다. 나는 86년간 예수 그리스도를 섬겼는데 그 분은 내게 한번도 잘못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분을 모독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 날은 맹수와의 싸움이 이미 끝난 후여서 그를 맹수에게 던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아우성치며 불에 태우라고 요구했다. 그를 불로 태우려 했을 때 공기가 그를 두르고 있어 불꽃이 주위만 감싸고 그에게 불이 붙지 않자 한동안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단도를 든 로마병정이 찔러 죽였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크리스챤들이 그의 시체를 가지고 가서 유사종교를 만들까 두려워해서 다툼을 피하기 위해 백부장이 시체를 태워버렸는데 크리스챤들은 태우고 남은 것을 거두어서 초기 증거인 순교의 기념으로 삼았다. 그리스어인 Martyr (순교)이라는 글의 의미는 원래 목격자(witness)라는 뜻인데 지금도 같은 의미로 쓰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나지막하고 특징없어 보이는 건물인데 그 건물 밑에 그가 순교한 장소를 기념하는 교회가 있었다. 온통 벽에는 성화가 그려져 있는데 폴리캅의 순교장면도 그려져 있었다. 불란서의 교구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서머나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잔인한 시절을 말하는 것 같다. 4 세기가 되어 기독교가 허락될 때 까지 무서운 환난이 몰아쳐 수 많은 신자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 그들의 피로 넘쳤던 경기장들은 여러 곳이 부서진 것을 볼 수 있었는데, 후에 신자들이 그 장소만 보아도 기억하기조차 끔찍하다 해서 다 부수어버렸다고 한다.
요한계시록 2장 8절~11절 “서머나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또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감옥에다 집어 넣으려고 한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서머나 4대 감독이었던 폴리캅의 순교를 기념하는 성 폴리캅 교회의 외부모습.
성 폴리캅 교회 입구.
성 폴리캅 교회의 입구를 지나 본당으로 향하는 복도.
폴리캅 순교기념교회 내부모습.
폴리캅 순교기념교회 내부모습.
서머나 현재 이즈미르라고 불리는 시내 도심지 풍경.
이즈미르의 한 호텔에서 바라본 에게해(Aegean Sea).
시내 호텔에서 바라본 해안 도시풍경.
모슬렘 국가 여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여성들의 평균수명은 45세라고 한다. 40세 밖에 안된 여인들의 거친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깊은 주름이 잡혀있어 매우 고달픈 삶을 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검은 고무신을 신고가는 아낙네. 옛날 한국에서도 6.25전쟁 후 피폐해진 세월에 신었던 신발이다.
이 사진부터 아래 사진들은 인터넷에서 얻은 사진들이다.
폴리캅 감독의 순교장면. 내가 찍었던 많은 사진들은 조금씩 흔들려서 쓸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어두운 실내에서도 플래시 라이트를 쓰지 않는 탓도 있고, 비록 그림들이지만 그 때 그 시절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이 엄숙한 경외심을 불러일으켜서 가슴이 떨려와 더욱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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