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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교회가 모두 터키 서부 소아시아(Asia Minor)지역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사도적 메세지의 영향으로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일곱 교회라고 하면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대,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로 서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여행하기도 좋은 조건이어서 그 당시에도 각 도시에 2,3일 안에 닿을 수 있었던 거리였다고 한다.

성경에서 언급한 순서대로 에베소를 출발하여 북쪽에 위치한 서머나를 지나 북동쪽에 있는 버가모로 가서 약간 남동쪽에 위치한 두아디라로 해서 그 밑에 사대, 빌라델비아 그리고 라오디게아로 가는 7 교회 여행지를 돌아보려고 한다.  지도를 펼쳐 7 교회 순서대로  따라가보면 짧게는 삼사십 마일에서부터 100 마일 안에 있어 보인다.  서머나에서 에베소는 40 마일 거리이고 서머나에서 사대는  56 마일 거리이다.

역사에서 에베소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의 히타이트 성경의 헷 족속 비문에서 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리웠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TurkeywithGirls

*이슬람 사원에서 코란 공부를 마치고 나온 어린이들과 함께한 필자.

몇 해 전 그리스 섬들을 돌면서 사도 요한이 유배를 당해 그 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썼다는 밧모섬(Patmos)을 들렀다가  서부 터키에 위치한   새의 섬이라는 뜻을 가진 쿠사다시에 들렀다가, 북쪽으로 17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에베소(Ephesus)에 갈 기회가 있었다.  한 여름의 살인적인 더위로 흐르는 땀 때문에 눈도 뜰 수 없었으나 처음 눈앞에 펼쳐진 유적들은 충격적인 경이 그 자체였다.

사정없이 내리 꼿히는 따가운 땡볕은 살 속까지 파고드는 것만 같아 유난히 더위를 타는 체질에 견디기 힘이 들었지만, 전체적으로 처음 펼쳐진 에베소 유적들은 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이번엔 눈에 차분히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사물을 보는 기준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이번 여행도 한 여름이었으나  어떠한 일이 있어도 처음 때와 같이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자세히 보아야겠다고 각오를 단단히 하였다.  경험이 쌓이는 만큼 지혜도 생겨 떠나기 전에 아예 두툼한 물수건으로 쓸 수 있는 것을 준비해서 가져갔다.  그 것을 기회있을 때마다 차가운 물로 적신 다음 목에다 둘렀더니 한결 시원하였다.   머리엔 모슬렘 여인들 처럼 앏은 스카프를 썼더니 훨씬 더위를 이길 수 있었고 모래바람이 불어와도 눈을 감지않아도 되고 입이 지근거리지도 않았다.  진작 이렇게 하고 다닐껄.  로마에선 로마인처럼 행동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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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온갖 수모를 당했던 에베소 대극장.  이 대극장 앞 긴 도로는 530m가 된다는데 이 도로의 이름을 아카디안 도로라고 하며 항구까지 이어졌었다.  도로 양 옆에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불어오는 바람이 아주 시원하다.  그 옛날 항구에 배를 멈추고 수 많은 뱃사람들이 떼를 지어 이 길을 통해 들어왔을 것이다.

*터키 최대 규모의 이 대극장은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피온산 기슭의 비탈을 이용해 건설된 이 극장은 리시마쿠스 시대에 지어졌으며, 오늘날의 모습은 트라얀(Trajan) 황제 시대의 모습이다.  그리스-로마 형식으로 지어진 이 아름다운 대극장은 피온산의 경사면을 이용해서 지어졌는데 관객석 높이 38m, 길이 158m의 반원형으로 청동과 도자기로 만든 확성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그 음향 효과가 뛰어났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에베소는 기원전 11세기에 이오니아인인 그리스 아테네의 카드로스의 아들 안드로클로스에 의해 점령되었고 그에 의해서 해안가에 그리스신들과 아테나와 아폴로 신전이 있는 전형적인 이오니안 도시가 건설되었다.

기원전 190년이 될 때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주위의 전쟁들로 편할 날이 없다가 아우구스탄 (Augustan period, 63 BC-14 AD) 시대가 되서야 안정을 갖게 되어 아시아 지역에 위치한 중요한  로마의 상업중심지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남겨진 유물들은 그 당시의 것들이다.

에베소를 지금은 에페스(Efes)라고 하는데 이스탄불에서 680 km 떨어져 있고 샐쥭과 서머나 사이에  위치해 있다.  2000년 전 에베소는 서부 소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번창하던 상업도시였는데 지금은 그 당시의 활발했던 모습은 간 곳 없고 페허만 외롭게 남아있다.  제일 큰 요인으로 예전엔 바닷물이 에베소 가까이 까지 와 닿아서 훌륭한 해안 도시를 형성하였는데  차츰 흐르던 강이 메워져 말라서 지금은 에베소가  에게해로 부터 6 km나 들어와 있다.    2000년 전만 해도 바다와 인접한 도시여서 해안에서도 거대한  대극장(The Great Theater)이 보였을 정도였다.  배에서 내려 바로 항구거리를  걷다보면 정면에 웅장한 대극장이 펼쳐있고  밤에는 그 양 옆에 늘어선 대리석 기둥에 횃불들이 켜져있어서 뱃사람들을 맞이했다고 하니 얼마나 운치가 있었을까 상상해 본다.

반 원형으로 지어진 이 대극장은 짓는 데만 수많은 세월이 걸렸는데 마지막 수리는 클라우디우스 황제(Emperor Claudius, 41-54 AD)와 트라자누스 황제(Emperor Trajanus, 98-117 AD) 때였다고 한다.  22 층 높이에 2만5천명이 볼 수 있는 대규모 극장이다.  에베소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건축물로 예술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이곳에서 초기 기독교와 기존의 우상숭배와의 충돌이 일어났던 곳이어서 그 의미를 더 한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 있던 회당에서 2년여 동안 설교하고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는 보통 건물이 비는 낮 12 시 부터 사용하였다고 하며  어떤 기록엔 오전 11시 부터 오후 4시 까지 사용하였다고도 한다.  바울의 전도로 여러 로마신들을 만들어 팔던 은장식공인 데메트리우스가  더 이상 그들이 만든 신들이 팔리지 않자 바울을 그대로 놔두었다 간 자신들의 일자리마저 잃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에 다른 은장식공들을 주동하여 바울과 그의 동료인 가이우스와 아리스탈쿠스를 대극장으로 끌고가 소란을 피운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그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바울은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언덕 위에 돌로 지어진 헬레니스 풍의 작은 성곽이 바울의 감옥으로 불리우며 페허로 쓸쓸히 남아있다.  이 건물은 이 도시의 설립자인 리시마쿠스 (Lysimachus, 306-281 BC)가 지은 것인데 바울이 이곳에서 고린도서를 썼다고 하며 그 때 그의 극심한 고통(고후 1:8)은 성경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 당시 아볼로(Apollos)파와 바울(Paul)파로 나뉘어져서 싸움이 생기자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기르시는 이는 하나님이 십니다’(고전 3:6) 라고 하여 심는 자와 물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나 기르시는 분은  위대하다며 하나님의 뛰어남을 전하였다.

그 곳에서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퀼라(Aquilla)가 가정교회를 세웠다(고전 16:19).  디모데와 두기고도 이곳 교회의 교역자였다.  그리고 에베소는 바울이 양자로 삼았던 오네시모(Onesimus)의 고향이기도 한데 그는 원래 도망친 젊은 노예였고 그 청년이 후에 에베소의 감독이 되었다.  이 일로 인해  도망친 노예들은 오네시모라는 이름을 가장 선호했다고 한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사도 빌립(Philip)의 딸들도 에베소에서 살았다고 한다.  누가복음을 쓴 누가의 무덤도 해안가에 가까운 지역에 있다.  사도 요한도 이곳에서 오랫동안 감독으로 있었으며 요한복음과 세 서신을 발송했고,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이곳 교회에 보냈다(엡1:1).  사도 요한도 에베소에서 생을 마쳤으며 그를 기념해서 지은 사도 요한 무덤이 있는 곳에 4세기 경에 지어진 사도 요한 무덤 교회도 있다.  에베소 해안가 가까웠던 곳에 AD 4세기에 지어진 성모 마리아 교회가 있는데 여기에서 그 유명한 종교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그 교회 앞에는 종교 지도자들이 살던 숙소도 있다.

기독교 초기에 사도 바울이 두 번째 선교여행 때 잠시 들렸던 곳이요(행18:19), 세 번째 선교여행 때에는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므로 성령이 강림하여 방언과 예언도 하고, 희한한 이적을 많이 행했으며, 그것을 본 마술객들은 마술책을 불사르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난 곳이다(행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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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에베소의 셀수스 도서관.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소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로, 쥴리우스 셀수스가 소 아시아의 총독으로 11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게 되자, 그의 아들 쥴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 셀수스를 기리기 위해 이 도서관을 건축하여 125년에 완성하였다.   도서관의 정면 입구는 2층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데, 지혜· 행운· 지식 그리고 선행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4명의 여성들의 석상이 있다.  도서관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중 벽으로 되어 있어, 당시 소장되어 있던 두루마리 책들을 보호하게 했다. 그러나 262년 코트족 침략 때 모두 소실되었다.  당시에는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에 이어 세계 3대 도서관이었으며 약 20만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극장에서 왼쪽길로 접어들면 대리석 길(The Marble Street)이 나오는데 이름 그대로 넙적넙적한대리석이 길에 깔려있고 길 양 옆의 보도는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무늬져 있으며 그 길 따라 대리석 기둥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 길이 45도로 꺽이기 전 끄트머리 오른편에 유명한 셀수스 도서관(Celsus Libriry)이 위치해있다.  소아시아를 지배했던 가이우스(Gaius Julius Celsus Polemaeanus)총독이 은퇴한 후에도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그 곳에서 생을 마쳤는데, 이 셀수스 도서관은 그의 아들이 책을 사랑했던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고 그의 아버지의 시신은 그 안에 묻혀있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학문 수준을 나타내는 셀수스 도서관 바로 앞에 매춘굴이 있어서 인간의 이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 대극장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도로의 대리석에 유명한 매춘굴 표시판이 새겨져 있어 뛰어난 학문의 도시인 동시에, 매춘이 성행했던 성적 타락의 도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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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의 문’에서 셀수스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주 도로인 ‘크레티아 거리’.  많이 소실되었지만 거리 양옆엔 온통 대리석 석상으로 장식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고, 아직 몇 개는 볼 수 있다.  길도 큼직한 대리석 조각들로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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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마리아가 살았다는 집.

에베소에서 약  5 마일 떨어져 숲이 우거진 산속에 성모 마리아가 그의 마지막 생을 보냈다는 장소가 있다.  산이 높고 구불거려 차를 타고 오르는데도 워낙 가파라서 차의 엔진마저 힘겨운 소음을 냈다.  그 분이 그 아득한 옛날에  이런 험한 산 속에서 정말 사셨을까 할 정도로 외진 장소였다.

이곳은 1818년에 12년 간이나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독일인 안나 에머리히(Anna Catherine Emmerich, 1774-1824)에 의해서 신비하게 확인되었는데 죽기 2년 전에 그녀의 환상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자신이 살았던 집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에베소 근처의 산이었다고 정확하게  현재의 장소를 일러 주었다고 한다.  그녀가 죽은 후1891년에 비로서 조사가 시작되었는데 실제로 그녀가 설명한 장소와  너무나  흡사하였다고 한다.  그 건물의 기초는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고 그 근처에 마실 수 있는 샘물이 있어서 그녀의 주장을 더욱 뒷받침 해 주었다고 한다.

특히 예수가 돌아가실 때 어머니를 부탁했던  사도 요한이 이곳에서 생을 마쳤으니 아주 가능한 일이다.  오래 전 부터 성모 마리아가 돌아가신 장소로 전해져 내려왔고 그곳 사람들도 이미 그렇게 믿고 있었다고 한다.   교황들도 이곳에서 두번이나 미사를 집전(1967년과 1979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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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온갖 소원을 적어서 벽에 꽂아 놓았다.

성모 마리아의 집에 들렀다가  약간 오른쪽으로 경사진 곳을 조금 내려가다 보면 나지막한  샘터가 있다.  지금도 여전히 맑은 샘물이 솟아나 사람들이 부지런히 물을 마시기도 하고 준비해간  플라스틱 병에다 물을 채우기도 한다.  물을 마신 후 다시 올라가는 길 오른쪽 벽은 온통 매듭들로 빽빽이 장식이 되어있는데  성모 마리아의 집에서 시작해서 샘물을 마신 후 각자의 소원을 적어 벽에다 꽂고 다시 성모 마리아 집에 가서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와서 모두들 부지런히 샘물을 마시고 올라가면서 그곳에다 소원을 적어 남겨놓느라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길게 늘어져 부산스러웠다.

생수는 병 고치는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성모 마리아의 집에 있는 벽난로의 재로 많은 기적도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불치의 암이나 다리 저는 사람 또는 태어날 때 부터 굽은 뼈였던 어린아이들도 고침을 받았다고 하여 많은 순례자들이 찿아 온다.

요한계시록에는 에베소 교회를 가르켜서 “나는 너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고 자칭 사도라는 사람들을 시험하여 그들의 거짓을 밝혀 낸 일도 잘 알고 있다.  더구나 너는 잘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끝까지 견디고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도 가고 형식과 의무만 남아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면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찿으라고 씌어있다.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 둘 수 없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내고, 낙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그런데 네게는 잘 하는 일이 있다. 너는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한다.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겠다.”(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현재 에베소의 유적은 겨우 30% 밖에 발굴하지 못한 것이라는데 이것만도 사람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니 그 당시에는 과연 어떠했을까?  그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만도 혼란스럽지만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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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 아고라.  가로 세로 110m의 넓은 터로 되어있는 고대 시장인 아고라는 에베소 사람들의 생활 중심지였다.  기원 전 3세기경의 건물로 아취형으로 만들어 진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이 마주 보인다.  이 것은 셀수스 도서관에서 시장인 아고라로 연결되는 문이다.  맨 뒤에 셀수스 도서관의 옆 모습이 보인다.  아우구스투스의 노예였던 마제우스와 미트리디우스가 해방되고 나서 황제 일가족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기증한 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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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하드리아누스(하드리안, 재위 117~138년) 황제의 신전.

*하드리안(Hadrian) 신전은 크레테스(크레티아) 도로상에서 가장 눈길을 끈다. 목욕탕 옆의 하드리안 신전은 위대한 건축물의 본보기이다. 138년경에 지어져 하드리안 황제에게 바쳐졌으며, 고린도 양식의 신전은 정면에 독특한 부조물과 장식이 되어 있다.

*건물의 현관입구에 4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데, 중앙의 2개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다. 현관을 들어서 안쪽 정면의 박공 머리 위에는 메두사를 닮은 여성의 모습이 나뭇잎과 함께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 왼쪽부터 아테나신, 셀레나신, 아폴로신, 에베소의 창시자 안드로클로스, 헤랄데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 데오도시우스 황제, 에베소의 아르테미스신, 데오도시우스의 아내와 아들이 차례로 부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치문에는 행운의 여신 니케의 조각상이 있고, 그 뒤 반원형에는 메두사의 조각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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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지구 끝이면서 비귀족지구가 시작되는 돌기둥. 이 돌기둥 안 귀족진영으론 일반인 출입이 통제됐다고 한다. 사진 왼쪽 돋을새김 석상은 사자를 제압한 헤라클레스가 위압감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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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소극장인 오데이온 극장, 약 1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음악 공연장으로 다른 야외 극장과는 달리 위에 지붕이 덮혀 있었다고 한다.  연극 공연 뿐만 아니라 회의장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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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헬레니즘 시기에 만들어진 이 조각상은 ‘멤미우스 기념비’라고 한다.  폰토스의 난에서 에베소를 평정한 로마의 독재관 술라와 아들 가이우스를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멤미우스(Memmius)는 술라의 손자인데 3대에 걸쳐 에베소를 지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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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안 황제 숭배 신전.  역사상 에페소는 4차례의 네오코로스(Neokoros)가 될 자격을 얻었다. 네오코로스가 된다는 것은 황제의 신전에 파수꾼이 된다는 것으로, 다른 도시들이 모두 부러워 할만한 특권이었다.  에페소는 처음으로 도미티안(81∼96년)에 대한 신전의 파수꾼 역할을 부여 받았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의 한 하인에 의해 암살 당하자, 에베소인들은 어렵게 얻은 네오코로스의 권리를 잃을 처지에 놓였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의 아버지 베스파시안(Vespasian)을 신으로 모셔 이 신전을 그에게 바쳤다.

*도미티안 황제(AD 81~91년)는 사도 요한을 로마로 불러 고문을 가한 후 팟모스(밧모섬)로 유배 시켰던 황제이다. 요한은 그가 암살 당한 후 에베소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이 도미티안 신전에서 발굴된 도미티안 황제의 조각상이 에페소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도미티안 신전은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의학의 상징으로써 뱀들이 서로 꼬여 있는 모양의 지팡이) 부조물로 장식된 2개의 동상 받침대 앞에 있다.  그 오른쪽에는 가이우스멤미우스를 위해 세웠다는 멤미우스 기념비의 잔해도 남아 있다. 가이우스멤미우스는 이 도시에 수로를 만든 건축가이며 의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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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티아(크레테스) 거리 중앙 북쪽에 있는 ‘트라야누스의 샘’ – 트라이안 황제 신전(우물)은 102~114년에 트라이안 황제에게 바쳐졌다.  이 것은 본래 12m 크기였으나 현재 축소된 크기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우물 중앙 받침대 위에는 실물 크기로 만들어진 트라이안 황제의 동상이 있었고 그 발목으로부터 물이 흘러 나오게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받침대와 오른발 한 쪽만 남아있다. 이곳에서 여러 황실가족의 동상이 발굴되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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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 도서관을 향해 길게 뻗은 크레티아 거리엔 온통 큼직한 대리석들로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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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상인들이 만든 아케이드 거리에 모자이크로 장식한 아름다운 거리.  덮고 건조한 날씨로 색깔이 많이 바랬으나 여전히 그 당시의 호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물을 부으면 모든 색이 되살아 난다.  당시 로마의 여러 속국들로부터 수입해 온 갖가지 화려한 물품들이 이어져 있던 상점들에 즐비했으며 부유한 상인들의 이층 빌라들이 주변에 늘어져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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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마리아의 집 앞에서.  옆의 고목나무가 성모 마리아 당시에 심겨졌던 나무가 아니였을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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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여신 니케(Nike), 이 부조는 헤라클레스의 문에 장식되었던 것이었는데 왼손엔 면류관을, 오른 손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스포츠 상표인 나이키의 로고는 바로 이 니케 여신의 왼손 어깨로부터 늘어진 옷자락 선을 본따 만든 것이라고 한다.

*꼭 자신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 여행사진을 싫어하기 때문에 사양했는데 본인 사진을 잘 찍지 않는다고 마고 부모님이 하도 뭐라고 하셔서 이번 여행은 본인 사진이 의도치 않게 많아졌다.  친구 마고와 함께 승리의 여신인 니케의 조각물을 사이에 두고 또 한번 찰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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