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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피아 사원, 비쟌틴 건축물의 걸작으로 5년 10개월(532년 2월~537년 12월)이 걸려 지어진 성 소피아 성당은 비쟌틴 황제인 유스티아누스에 의해 지어졌는데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오스만 제국에 함락 당한 후 아름다운 대성당은 이슬람 사원이 되었고 모자이크 성화는 회칠로 덮여졌었는데 최근 그 회칠을 벗기는 작업을 하였지만 많은 부분의 회손이 심하다.

***2002년 여름에 터키의 서부지역에 위치한 요한계시록의 7 교회를 여행하고 난 후 미주중앙일보에 10월 29일부터 8주에 거쳐 연재했던 것을 이곳에 올립니다.

터키는 지정학상 아시아와 유럽이라는거대한 두 대륙을 잇는 지점에 위치해 있고 주변 강대국들의 이익이 직결되어 있는 곳이어서 그들의 역사는 파란만장 하였다.  현재의 터키는 유럽에 속한 지역과 아시아 에 속한 지역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특히 아시아 쪽 지역은 그리스 인들에겐 해뜨는 곳이란  의미로 아나톨리아(Anatolia)로 불리웠고, 로마인들에겐 소아시아(Asia Minor)로 불리웠다.   옛 부터 수 많은  문명들이 일어났다 사라지곤 하였기 때문인지 터키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세계의 역사와 인류 문화의 역사를  만나 볼 수 있다.

인류문명의 발상지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동부터키에서 발원하고 인류 최초의 집단거주지가 발견된 챠탈훼윅(6500~5650BC)의 역사는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 간다.     터키 동부엔 노아의 방주가 머무른 아라랏산이 이락과 가까운 곳에 있고,  하란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가나안을 향한 여행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구약성서에 모세의 출애굽이 있었던 시절에 아나톨리아 지역에는  히타이트(Hittite, 1800-1200BC) 문명이 왕성하였다.  그들과 이집트의 람세스 2세(Ramses II, 1290-1224BC)가 시리아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싸움에서 히타이트가  세계 최초의 쌍두마차를 개발해 이겼다고 한다.  구약성서에는 히타이트인을 헷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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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Ankara)에는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Museum of Anatolian Civilisations)이 있어서 챠탈회윅의 촌락에서 발견된 벽화들도 볼 수 있고, 히타이트시대에 쌍두마차를 타고 활을 쏘는 모습을 돌에 새긴 것을 비롯해서 많은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또한 그 곳엔 장미의 나라 프리기아(The Phrygians, 1200-600BC)에 황금의 손과 당나귀 귀로 유명한 전설속의 인물인 미다스(King Midas, 725-696BC) 왕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공기가 차단된 특수공법으로 부장품이 거의 그대로 보전되었다는데 미다스 왕은 발굴당시 옷을 입은 채로였으나 공기에 접촉되는 순간 옷은 산화되어 버리고 뼈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묘에서는 금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왕의 귀도 보통보다 약간 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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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터키를 지배해오던 리디아(Lydians)를 기원전546년에 페르시아(지금의 이란)가 점령하면서 리디아의 수도였던 사데(Sardis, 요한계시록에 나오는7 교회중 하나)가  페르시아의 중요한  4명의 총독들 중 한명의 관활권이 되었다.

그러다가  마케도니아 왕(지금의 그리스)인 알렉산더대왕(Alexander the Great)이 역사 속에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  그가 기원전 334년에 아나톨리아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죽을 때 까지 11년간 커다란 업적을 남겨 오랫동안 아나톨리아는 그의 영향을 받았다.

차츰 로마가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로마평정시대(Pax Romana, 14BC-AD191)가  도래한다.  그 후 비쟌틴시대(Byzantine, 또는 Eastern Roman Empire,  AD 330-1453)가  열리고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대제(Constantine the Great)가  기원 후 330년에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지금의 이스탄불)로 옮긴다.  그 후 황제 데오도시우스 1세(Emperor Theodosius I, AD 379-395) 때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국교가  된다. 콘스탄티노플은1453년 술탄 마메드 2세가  정복할 때 까지 비쟌틴의 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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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인들은 기원전2000년경에 지금의 몽고 외곽지역에서 살았던 기마 유목민들인 우랄-알타이(Ural-Altaic)족이다.   투르크라는 단어는 기원전 1300년경 중국사기에 최초로 투쿠에(T’u-chueh or Durko)라고 기록되었는데 방패라는 뜻인 투쿠에가 튀릭으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그들은 기원전 8세기경 몽골의 오르혼 강 주변에  여러 비문을 남겼는데 그 비문(Orkhon inscriptions)에는 여러 부족들을 하나로 모아서 중국을 대항했던 기록이 있다.  그 비문에 나타난 쾩튀르크는 ‘하늘이 내려 준 터키인’이라는 뜻을 나타내는데 그 의미는 ‘천자’(天子)라고 한다.   터키인을 나타내는 튀르크는 돌궐이 남긴 오르혼 비문에 새겨진 튀뤽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힘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터키에서 돌궐을 ‘쾩튀르크’로 적고 있다.  또한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8~9세기에 중앙아시아에 살던 튀르케 족을 튀르크라고 기술하였다고 한다.

한국이 터키를 응원할 때 쓰던 ‘튀르키예 튀르크 하이디 바스트르’(‘터키인의 터키 진격하라’는 뜻)를 기억하면 조금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여행중 정말 이 말과 함께 카르다쉬(형제)를 요긴하게 잘 써먹었다.

우리 나라  한반도에 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시대에는 흉노족이 바로 이웃해 있었다.  흉노의 후예인 돌궐도 기마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세워진 고구려와는  중국의 수와 당을 대항하는 긴밀한 관계였다고 한다.

사기(史記)에 있는 흉노전에는 한민족의 조상인 예맥(濊貊)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   예맥족은 만주 몽골계, 튀르크계들을 포함하는 같은 조상에서 갈라진 종족이라 할 수 있다는데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에 이어 백제를 이룩한 민족이었다고 한다.

예맥족은 기원전 700-500년경에 중국의 고원지대인 오르도스 지역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이 지역은 흉노족이 거주했던 지역과 동일하여 예맥과 흉노가 같이 살았던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 곰을 신성시하여 수호신으로 숭배한 같은 토템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민족과 튀르크족은 공통의 조상을 갖고 한민족은 동쪽으로 튀르크족은 서쪽으로 간 셈이다.  서쪽으로 이동한  튀르크 유목민들은7세기경에 아랍지역에 다다르게 됐는데 아랍사람들은 그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지금의 터키에도 모슬렘이 99%에 이른다.

전통적으로 터키인들은 타민족과 결혼하므로 이웃과 혈맹관계를 맺어온 민족이다.  티무신이라고 하는 징기스칸도 사실 절반은 몽골이었고 절반은 터키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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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있는 국부(國父) 무스타파 카말의 대영묘(大靈廟)

역사적으로 터키인들은 기원후 10세기경에 아나톨리아에 들어와서 살았던 것으로 본다고 한다.  그 후  샐쥭 터키(Seldjuk Turks)의 지배자인 투그룰 베이(Tugrul Bey)가  1055년에 바그다드를 정복하면서  아랍지역뿐 만 아니라 서쪽지역도 침략하여 대부분의 동부 아나톨리아 를 지배했다.

13세기 후반엔 몽골의 침입으로 셀쥭은 힘을 잃게  됐으며  그 뒤를 이어 오스만 제국(The Ottomans, AD 1290~1923)이 나타났다.  1453년에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였고, 17세기엔 막강한 국가로 군림하였었는데 점차 기울어져 가다가  1차 세계대전 때 독일편에 섰다 망하였다.  그 후 현대 터키의 국부가 된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의 지도력으로 1923년 현재의 터키공화국이 새로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를 아타튀르크(Ataturk)라고 부르는데 아타는 터키어로 아버지라는 뜻이고 튀르크는 터키라는 뜻으로 터키의 아버지 즉 국부라는 뜻이다.

무스타파 케말은 서구화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종교와 정치를 완전히 분리시켰다.  그때까지 언어만 있지 글자가 없던 것을 라틴어로 표기된  터키어를 만들고  공용어였던 아랍어 사용을 금지시켰다.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고,  성(姓) 사용법을 공표함으로 그 때까지  없던 성을 짓도록 하였다.   이렇듯 그가 57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5년간의 개혁은 엄청난 것이었고 지금까지 그의 뜻이 정치에 충실히 반영되고자 한다.

다음부터 천천히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일곱 교회를 함께 여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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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사원 내부 모습.  터키가 점령한 후 오랫동안 모슬렘 사원으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한다.  정면 중앙 오른쪽 위에 높이 달린 둥근 방패엔 알라라고 씌여있고 왼쪽엔 모하멧이라고 씌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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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사원 외부에 양들이 새겨진 기독교 유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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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사원 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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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사원 뒷 빌딩 위에 한 마리 개가 오수를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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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아메트 사원이 그 내부에 2만 1천개에 달하는 파란색 이즈닉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서 ‘블루 모스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여섯 개의 미나렛을 갖고 있는 유일한 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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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모스크 안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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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모스크의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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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피 궁전(Topkapi Palace), 술탄 마메드 2세(Sultan Mahmed II)에 의해서 1459년 첫 공사를 시작으로 지어진 톱카피 궁전은 1465년부터 1856년까지 오토만 제국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이 궁전은 보스포러스 해안을 따라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따서 지어진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1856년에 옮겨질 때까지 사용되었다.  그 후 톱카피 궁전은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여러가지 역사적 유물들이 전시된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특히 오토만 제국의 보물과 보석들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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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피 궁전 안에서 보는 문.  멀리 블루 모스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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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피 궁전 안에서 친구 마고와 함께.  당시 이스탐불 외국인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던 마고와 미국에서 딸을 보러 온 마고의 부모님과 함께 4명이서 바울의 선교여행의 행적을 둘러보았다.  마고는 몇 년전 늦은 나이에 착한 남자를 만나 캘리포니아에서 결혼해 살고 있다.  그 녀가 터키말을 잘해서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 만 아니라 터키인들의 삶을 자세히 들려주어 여행이 더욱 풍성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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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피 궁전 안에 아름답게 조각된 섬세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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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ςe Sa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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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 아타튈크의 대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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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 아타튈크의 관이 안치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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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 안에 황금의 손 마이다스 왕의 무덤이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뒤에 왕이 누워있었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친구 마고가 우리의 가이드로부터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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