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긴잠을 털어버리고 만물이 소생하는 4월의 문턱을 넘을 즈음 스페인에서 한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며칠간 함께 간 직장동료들과 여행하다 문득 우리가 몇년 전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가졌던 어느 스페인 광장에서 엄마 생각이 난다며 전화선을 통해 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인터넷에 아주 저렴한 터키행 항공티켓이 나왔다며 함께 여행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몇년 전 그리스 섬을 돌아서 터키 서부지역에 잠시 머물렀을 때, 한 여름의 폭염으로 주체할 수 없이 줄줄 흐르는 땀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터키의 어마어마한 유적들을 돌아보며 다시 와서 보아겠다고 생각했던 차에 딸의 제안은 마른 잔디를 적당히 적셔주는 봄이슬과도 같았다.
인터넷이 있으므로 해서 여행이 더욱 편리해졌다. 여행지의 호텔도 앉아서 미리 보고 결정할 수 있고 여행일정도 정보수집을 통해 각자의 입맛에 맞게 짤 수 있기 때문에 여간 편리해진 것이 아니다. 이젠 전 세계가 점점 하나로 열려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인터넷바다를 유영하면 할수록 앞으로 솔찍하고 정직하고 투명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딸이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몇 시간 안에 짐을 꾸려 이스탐불로 향했다. 일 주일의 여유로 떠났는데 가능하면 카파도시아에 가보고 싶었지만, 다시 비행기를 타기엔 일정이 빠듯했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역사적인 이스탐불만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 될수록 많이 구석구석 보기로 했다.
현대 터키를 세운 무스타화 케말 아타튈크의 이름을 따서 지은 아타튈크공항에 도착했다. 아타튈크의 많은 공적가운데 하나는 터키어를 서양문자화 한 점이다. 모슬렘국가들을 여행할 때 제일 불편했던 점은 그들의 꼬부랑글자를 도저히 읽을 재간이 없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여성들의 옷차림을 서구화한 점이다. 국가에서 베일 벗기를 권장하지만, 일부 여자들이 오히려 그대로 전통을 유지하고 싶어 베일로 얼굴을 감싼다고 한다. 그리고 남녀평등을 인정한 그는1934년에 여자들도 투표할 수 있도록 했다. 남자들의 심한 반발을 잠재웠으며 그 자신도 한 여자만 결혼해서 솔선수범을 보였다고 한다. 57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마쳤지만 지금의 터키를 있게 했다.
마중나온 작은 차로 정해진 호텔 근처를 두시간이나 돌고 돌다 겨우 찿아냈다. 운전자가 길을 물을 때마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데 모두 틀려 헛수고였다. 호텔을 구 도시지역에 잡은 관계로 길들이 꼬불 꼬불하고 정겨웠다. 오토만 시대의 옛 건물을 개조해서 지은 호텔은 크진 않았지만 운치가 있어 보였다. 딸은 정전이 잘되기 때문에 자체 발전기가 있는 이 호텔로 정했다고 한다.
시원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호텔 바로 옆엔 그 유명한 불루모스크의 벽이 보였다. 바로 그날부터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시가지를 누볐다. 전철과 뻐스를 탔고 일부러 종점까지 갔다. 살고 있는 모습도 보고 길을 걸으면서 사람들도 만나는 것이 여간 흥미로운게 아니었다.
이스탐불 하면 쏘피아사원과 불루모스크, 중국에서 시작된 씰크로드의 종착지였다는 그랜드바자와 베르사이유궁전을 본땄다는 썰탄의 궁전이었던 돌마바체와 톱카피 궁전, 그리고 그리스인들이 만든 지하의 물 저장소와 로마유적들, 셀 수도 없이 많은 유적들이 널려있었다.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여러가지 다른 문명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그들 만의 독특함을 갖고 있었다. 수 천년의 세월이 마치 어제와 오늘처럼 서로 맞닿는 듯했다.
너무 걸어 지친 날 저녁, 불루모스크 근처의 자그마한 호텔 레스토랑에 피곤한 하루를 마감하며 조용한 분위기의 희미한 촛불 아래 아이란을 마시며 딸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른 여행객들이 우리를 자매로 착각해 주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그 식당 옆 테이블에 있던 미국에서 온 어느 우아한 노부부는 놀랬다는 표정으로 모든 부모들의 꿈이라며 부러워했다.
또 어느 날 저녁엔 5백년 전에 지어졌다는 전통적인 둥근 지붕에 구멍이 난 터키탕에서 피곤을 풀어보기도 했다. 거의 끝나고 탈의실로 나오는데 마침 그 악명높은 정전사태가 일어나 당황했다. 도로에 있는 몇몇 식당들은 횃불을 높이 매달고 몇 개씩 태우고 있었다. 겨우 엉금엉금 더듬다시피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자가발전기 혜택을 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곳에서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한인들이 전체에 약 5백명 쯤 살고 있다고 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가 모두 터키에 있을 만큼 신약시대에 기독교가 활발했던 지역에서의 전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스람교 이외의 개종이 허락되지 않는 곳이기에 드러내지 않고 일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 중 몇 가정은 선교목적으로 왔다며, 자립선교와 젊은이 선교라고 한다.
우리가 이스탐불대학을 방문했을 때 자신이 흠모하는 법대를 나왔다는 딸에게 한 여학생이 이야기 하고 싶다고 해서 같이 몇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도 법관인 그녀는 법학을 전공하는데 미국처럼 대학을 졸업한 후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처럼 학부에서 법을 전공한다고 한다. 같이 대화하면서 남성위주의 모슬렘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침 시험기간이라 모두 바빠보이는데 학교식당 앞 벤치에서 얼굴이 희고 금발을 한 여학생을 만났다. 그런데 그 녀가 약간의 한국말을 해서 너무 놀랐다. 알고 보니 영어전공인 그녀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 여행사에서 일하는데 1998년에 완전히 기독교로 개종했다며 너무 기쁘다는 것이었다. 그 곳은 정식으로 개종하면 주민등록증의 색이 바뀌어지는데 외면적으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지만, 그 증명서를 가지고는 자영업을 빼고는 취직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어떻게 이스탐불대학 안에 들어 갈 수 있었냐며 모두들 의아해 했다. 아마 아침 일찍이라 그냥 통과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점심 때 즈음 길 건너 학교식당으로 향하는 건물 입구에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복경찰인 듯한 남자가 증명서를 요구하며 일일히 첵크했다.
떠나기 전날 배를 타고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보스포러스해협을 가로 질러 옛날 그리스인들이 지은 성벽까지 걸어 올라가 그곳에 기대어 서서 흑해를 내려다 보았다. 우리는 너무 걸어 피곤했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다.
자신을 찿아 떠났던 여행에서 뉴욕으로 돌아온 후 한 동안은 깡그리 잊고 있었던 현실로 돌아오는 아늑함도 있었다. 지금도 가끔 호텔에서 나오는 아침식사를 마주하고 하루의 계획을 짜며 이야기 꽃을 피웠던 귀중한 순간들을 떠올리며 혼자 빙그레 웃는다. 다음 이곳에 다시 오게 된다면 아직 못가본 곳을 가자던 것과 못다한 이야기를 마음껏 나누던 일들이 소중하고 귀하기만 하다.
이틀 전 그곳에서 살고 있던 한인부부로 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낯설고 생소한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도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우리의 이야기에 자극받았다는 한 친구는 딸에게 불만을 늘어 놓아 며칠 전 딸과 함께 그리스와 터키를 두 주간 여행하고 오게 됐다고 자랑했다. 지금쯤 그 친구는 딸과 함께 어느 낯선 곳에서 자신을 찿고 있을런지, 또한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을런지 마냥 궁금해진다.
2001/05/02
윤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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