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banon-Tyre in South — 성경에는 Tyre라는 지명을 두로라고 한다.
두로는 시돈에서 40km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다. 두로는 고대 페니키아(성서명: 베니게)의 주도(主都)로, 지중해를 주름잡는 무역의 중심지로 자주물감 산업과 조선사업, 카르타고를 비롯한 중동 각국과의 해상무역으로 경제적인 번영과 문화의 꽃을 피웠던 역사적인 상업도시이다. 세라큐레스란 사람이 자기가 기르던 개의 입에 붉은 물감을 보고 처음으로 자주색 물감을 발견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당시의 자주색 물감의 값은 금의 가격과도 같았다고 하니, 성경이 특별히 루디아를 두아빌라 성(터키)에서 자주장사를 했다고 기록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당시 해상의 여왕과도 같았던 두로는 경제적인 풍요속에 주변 지중해의 많은 섬들을 식민지로 거느리는 부유한 왕국으로 떠오르면서 열강의 침략과 찬탈이 끊임없었다.
이집트 지배가 끝나고 아시리아(BC 10세기)가 서쪽으로 진출하던 동안에 페니키아의 역사는 주로 티레가 주도했다. 이 도시국가는 페니키아 국가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었으며 지중해 지역 전체에 식민지를 만들어나갔다.
두로의 네크로폴리스(죽음의 성읍)
두로 성읍의 동편에서 서편으로 이어지는 로마 가도(街道)를 따라 두로의 네크로폴리스가 놓여 있다. 옛 공동묘지이다. 밝은 햇빛 아래 무심하게 핀 봄의 들꽃들이 공동묘지 석관들의 을씨년스런 모습을 감추어준다. 터키 파묵칼레 근처 히에라 폴리스에서도 성 앞에 네크로폴리스를 보았었는데… 으레 도시가 시작되는 성문 앞에 공동묘지를 조성하는 것이 당시 로마의 관습이었던 모양이다.
이 공동묘지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네크로폴리스로, 로마와 비잔틴 시대 (AD 2세기부터 7세기까지)의 유적이다. 멋지게 장식된 거창한 돌관들. 어떤 석관들에는 고인의 이름과 직업을 새겨놓기도 했다. 대리석으로 된 여러 개의 석관들도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은 이 관들이 그리스나 소아시아에서 직수입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부유층의 무덤들이다. 그러기에 이곳의 무덤들은 귀중품을 훔치려는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어왔다.
그 당시, 시체들의 입에 동전을 물려주는 풍습이 있었다. 저승으로 가려면 망각의 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때 사용할 뱃삯이라고 한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 동전들이 도굴꾼들의 유혹물이 된 것이다. 이것을 훔치느라고 도적들이 공동묘지에 와서 동전과 함께 다른 귀중품들도 가져갔다. 아마 모르긴 해도 장례 때 뱃삯을 집어 넣었다고 하고서 슬그머니 자신의 주머니에 넣은 일도 많았을 것 같다.
히포드럼으로 들어가는 개선문
네크로폴리스가 끝나는 곳에 20m 높이의 아치가 있는 개선문을 통과한다. 로마황제 세브러스 셉티무스를 기리기 위해 B.C. 2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다. 개선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같은 시기에 이룩된 고대 로마의 거대한 전차경기장 히포드럼이 펼쳐진다.
키루스가 2세가 통치하던 이란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BC 538년 Tyre(티루스) 지역을 점령하였다. 티루스 북쪽으로 32km 떨어져 있는 시돈은 이 제국의 주요해안도시가 되었다. BC 332년 티루스는 8개월에 걸쳐 저항했으나 결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에 항복했다. 이 사건으로 큰 상업도시였던 티루스는 몰락하고 주민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BC 64년 페니키아는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屬州)로 합병되었다.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만들어진 석관들은 멀리 그리스나 다른 곳에서 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자신의 직업이나 이름을 적은 관들도 있어 매우 부유층들의 무덤터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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