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년 여름 한 낮에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주도(主都)였던 세비야의 거리를 걸으며 속으로 적이 놀라웠던 적이 있습니다. 거리의 가로수가 온통 오렌지나무였던 것입니다. 잘 다듬어진 싱그러운 잎사귀들을 뽐내며 건장한 청년처럼 딱 버티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한 여름 태양이 살갗에 파고들 듯 내리쬐어 40도는 족히 넘기는 날씨였습니다. 강렬한 열기를 흠뻑 먹고 자란 오렌지나무가 얼마나 튼실한지 막 자란 가지들을 정원사들이 깔끔히 다듬고 있었는데 잘려진 가지들이 길가에 수북이 쌓이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오렌지는 보기만 좋을 뿐 너무 시어서 먹을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해 조금은 실망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왕이면 달콤한 열매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조금 다행인 것은 직접 먹을 수는 없어도 가공하면 맛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전에 의하면 18세기에 스페인 배가 풍랑으로 스코트랜드의 도시 던디(Dundee)라는 항구에 머물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배 안에는 세비야의 오렌지도 있었다는데 그곳에서 던디 식품점을 하던 제임스 케일러가 그 오렌지를 구입하게 됐다고 합니다.
이 세비야의 두툼한 오렌지를 본 어머니 켈리는 가능성을 보았지요. 그 오렌지에 물을 붓고 설탕을 넣은 후 끊여보았더니 맛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1797년부터 오늘까지 내려오는 던디 오렌지청(James Kailler & Son, Dundee Orange Marmalade)이 된 것입니다.
세 비야의 오렌지는 달콤한 오렌지보다 펙틴이 더 들어있어 쫀듯한 맛을 냅니다. 한국에선 모과나 유자 그리고 매실 같은 것으로 청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과일로는 적합하지 않지만 가공하면 차로 마셔도 되고 음식에 넣어 독특한 향과 풍부한 비타민을 얻을 수 있어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스페인의 나라 꽃은 오렌지 꽃이라고 합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를 대표하는 꽃도 오렌지 꽃이지요. 2007년 인구통계에 의하면 세비야에 대략 70만 명이 살고 있다는데 오렌지나무가 7만 구루나 된다니 인구 10명당 한 구루가 되는 셈입니다. 꽃피는 계절이 오면 온 세비야에 오렌지 향기가 바람에 날릴 것입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저의 마음이 세비야에서 잠시 뛰기도 했습니다. 미지를 향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돛을 올리고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끝없이 항해 하는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지요. 16세기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유해가 세비야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고 마젤란이 세계일주의 닻을 내린 곳도 바로 이 세비야이기 때문입니다.
세비야는 플라멩코의 본 고장이며 스페인에서 가장 크고 멋진 마에스트란자(Maestranza) 투우경기장과 잘 정돈된 투우박물관이 있어 정열적인 스페인을 상징하는 두 가지를 모두 갖춘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비야는 오페라 비제의 <카르멘>, 모차르트의 <돈 지오바니>, <피가로의 결혼>,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베토벤의 <피델리오> 등등 많은 오페라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플라멩코는 5세기경 집시들이 와서 현지무용을 발전시키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플라멩코에서는 기타의 연주나 민요, 무용의 악보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구전되고 암기되어 연주된다고 합니다. 단순한 5선 보로는 복잡하고 난해한 민족음악을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플라멩코보다 볼레로가 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원래의 볼레로는 18세기 경 유명한 무용가 돈 세바스챤 세레소가 고안한 춤으로 악센트가 강한 3박자를 이용하여 현악기와 케스터네츠의 반주로 만든 무곡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원래 것보다 두 배나 느린 템포로 리듬도 다르게 작곡한 관현악곡인 라벨의 볼레로가 있습니다. 느리면서 계속 동일한 리듬으로 반복되어 단순하면서도 매우 인상적이기 때문에 더 유명해진 것 같습니다.
1984년 사라예보에서 겨울올림픽이 열렸을 때 영국 팀이었던 토르빌과 딘(Torvill & Dean)이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완전점수를 받고 금상을 탔던 것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지금도 보라 빛 푸른 소매를 바람에 날리며 라벨의 볼레로 음을 타고 흐르듯 은반 위를 환상 속으로 미끄러지는 한 쌍의 모습을 보노라면 여전히 숨이 막히고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합니다. 그래서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창 밖의 흰 눈을 보며 오렌지나무 곁에서 토틸라에 던디 오렌지청을 바르고 따끈한 차와 함께 라벨의 볼레로를 듣고 있자니 생각이 많이 흘러간 것 같습니다. 오렌지나무는 나를 생각하게 하는 나무인 것 같습니다.
2009/01/21
윤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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