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결함이나 잘못을 진심으로 타이르는 일이나 그런 말’을 충고(忠告)라고 국어사전은 설명하고 있다비슷한 의미의 말로는 충언(忠言), 조언(助言), 권고(勸告), 경고(警告), 훈계(訓戒) 등이 있다.

뜻글자 즉 표의문자(表意文字)인 한자는 글자의 형태가 소리(音)와는 상관없이 사물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도 있고,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글자를 한 데 모아 어떤 의미를 나타내게 한 것도 있다. 충(忠)자의 경우는 후자에 속한다. 

예컨대 친할 친(親)자도 후자의 경우에 속하는 글자이다. 친하기로 따진다면 세상에 부모자식 만큼 친한 사이가 없다. 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가 삼강오륜 (三綱五倫)인데, 삼강의 하나가 부자유친(父子有親)인 것만 보아도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친(親)’자의 형태를 보면 나무 목(木)자 위에 설 입(立)자를 올려놓고 그 옆에 볼 견(見)자를 더한 글자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모양을 한 글자가 친하다는 의미를 나타낼까. 억지춘향이 될지 몰라도 다음과 같은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자식이 출타를 했는데 해가 저물고 귀가 시간이 되어도 소식이 없자, 어버이가 나무 위에 올라가 담너머로 멀리 바라보며 이제나저제나 하고 애타는 심정으로 자식을 기다리는 상황을 형상화한 글자가 친(親)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무수한 한자들 가운데는 이런 풀이가 가능한 글자는 수도 없이 많다. 그게 표의문자의 한 가지 특징이다. 뜻글자인 한자를 익히려면 이런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재미가 있을 뿐아니라 순리적이며 자연스런 학습방법이라 하겠다.

충성 충(忠)자는 마음 심(心) 위에 가운데 중(中)자를 얹어놓은 형상이다. 마음이 좌나 우로 치우침이 없이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상태라는 의미 즉 공정한 마음을 나타낸다는 의미의 글자이다. 그렇다면 충고는 선의(善意)에서 공정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말한다, 알린다, 고(告)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남의 충고 받아들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별반 없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 충고를 꺼리는 인간심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람은 원래 자기 중심적이요 이기적 성향을 지닌 존재이다. 성선설, 성악설 등의 거창한 담론은 차치하고라도 인간은 생존본능에서 이와 같은 배타적, 자기중심적 성향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진심의 충고라도 충고는 애초부터 환영과는 거리가 먼 행위이다. 그렇다면 충고는 아예 무의미한 행위가  아닌가. 어떤 상황에서도 충고 충동은 자제(自制)하는 편이 상지상책이다. 꿀도 약이라면 싫어하는 세상이다. 마지못해 충고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가급적 적게 짧게 하는 것이 좋다.

충고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않는다. 충고하고 나서 대접 받기를 기대한다면 그런 생각이야 말로 망상이요 착각이다. 그것은 부질없는 연목구어(椽木求魚)다. 너무 가혹한  평가인가. Thank you for your advice. 는 우리에게는 번역될 수 없는 말이겠다.

더구나 나이 든 사람들이 하는 충고는 젊은이로 하여금 노인을 더욱 경원시하게 하는 요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역공(逆攻)으로 돌아오는 홍두깨는 망령이요 치매란다. 충고 좋아하는 사람은 적(敵)이 많다.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충고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잔소리요 간섭이요 참견이다. 그들에게 충고는 긁어 부스럼내기다.

울며 겨자 먹기로 껄끄러운 충고를 들어야 하는 편의 뒤틀어진 관점에서 보면 충고는 한 마디로 난센스(nonsense)다.  아무리 선의의 조언, 충고라 하더라도 그것은 건방지고 주제넘은 사람의 월권행위(越權行爲)다. 충고자는 싱거운 동네 구장(區長)으로 치부될 뿐이다. 충고,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공공장소나 지하철 등에서 가끔 목격할 수 있는 어색한 장면 중 하나가 노인이 못마땅한 듯한 청소년을 향해 충고 비슷한 독백을 하는 장면이다. 십중팔구 돌아오는 반응은 “너나 잘 하세요” 투의 시큰둥한 비웃음이다.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이 더 민망할 지경이다. 소수의 그 정도의 반응은 그래도 약과(藥果)다. 다중(多衆)의 표정이 오불관언( 吾不關焉)이기 때문이다. 충고하던 노인이 아이들에게 뭇매를 맞았다는 신문기사는 이제 뉴스거리도 못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서이기 망정이지 내왕하는 사람이라도 많지 않는 장소에서라면 그 정도도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게 우리 세태다. 평생 덕망과 경륜과 지혜를 쌓은 원로(元老)가 철없고 미숙한 젊은이의 경거망동(輕擧妄動)을 목도(目覩)하고도 한 마디  충고조차 할 수 없게 된 세상, 이대로도 괜찮은 것인가. 

인성교육은 이제 물건너 갔는가.  효, 경로사상, 예절, 질서 등의 기초생활교육은 포기했는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 그렇다. 이제는 구더기가 참으로 무섭다. 구더기가 많아 장을 담글 수가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게 개탄(慨歎)스럽다. 

2011. 03. 06.

岷奎 두 돌을 기려 생일파티 하던 날 / 仁川 松島에서 / 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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