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25일은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 날이어서가 아니
다. 크리스마스는 누구에게나 어느 해에나 닥쳐오는 세계인의 명절이다. 내일
은 한 사람의 귀인(貴人)이 우리 집을 찾아 오는 날이다. 오후 5시경이면 인
천 공항을 통해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손자가 방문차 일시 귀국을 한다.
세상 물정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것이 한국에서 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어미 따라 미국으로 건너 간 세월이 그 사이 아득
히 10년이 흘렀다. 이제 고등학교 졸업을 한 학기 남겨 두고 다 큰 성인이
되어 혈육을 찾아 고국을 잠깐 다니러 오는 것이다.
아비로서 할아비로서 그들의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이 글을 쓰자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감정이 격해져 자격지심(自激之心)을 억누를 길이 없다. 지나간
10년이 그들에게는 너무도 힘들고 외로운 고통의 세월이었기에 하는 소리다.
특히 아무 죄도 없는 그 어린 것이 이역만리 머나먼 타국 땅에서 겪어야 했
을 설움과 어려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 할 말을 잃는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레 외조부인 내가 그 손자에 대해 이렇게도 애틋한
정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 일을 이처럼 의미심장하게 다루는지 궁금할 것이
다. 그는 태어나자 줄곧 외가인 우리 집에서 온 식구들의 축복과 커다란 사
랑 속에서 유아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우리 집엔 그의 어릴 적 사진들이 거
실과 나의 서재에 걸려있다. 근년 훨씬 나중에 태어난 귀여운 두 꼬마 손자
들의 사진들과 나란히.
첫 사랑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 다른 사랑보다는 그 의미가 각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나와 집사람에게는 물론 외삼촌인 우리 두 아이들에게
도 첫사랑이었다. 녀석이 어렸을 때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으
며 자랐을 것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집사람과 나
는 그 녀석 때문에 너무도 행복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사랑은 한 톨도 남
김 없이 녀석에게 죄다 주었다고 생각한다. 녀석도 이제는 어느 정도 그런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키도 덩치도 나보다 훨씬 더 커버린
곰 같은 그런 녀석이 내일 10년 만에 고국 땅을 밟는다.
네 죄는 네가 알렸다. 지난 날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더라면 그들이 그런 어려움은 겪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에 자탄하는 말이다. 아무리 출가외인이라지만 내가 그 때는 나의 딸과 그에게 다소 야속했던 면이 없지가 않았던 것도 같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다. 더 이상 과거지사를 두고 후회하거나 누구를 원망해 보았자 부질없는 일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다. 앞으로는 희망이 있다. 서광이 비친다. 지금까지 그렇게 된 데는 시련과 연단을 통해 그들을 더 큰 그릇으로 키우기 위한 하나님의 숭고한 뜻이 담긴 게 아니었나 자위도 해본다.
나도 그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달리한 지가 이미 오래된다. 이제는 더 이상 그 딸이내게는 출가외인 만은 아니다. 그는 나의 핏줄이요 생명의 첫 열매다. 그도 손자도 꼭 같이 소중하고 귀한 나의 생명 같은 존재다.
그러나 손자의 이번 고국방문은 어디까지나 일시 방문일 뿐 금의환향(錦衣還
鄕)도 아니요 내가 바라는 영구 귀국은 더구나 아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이렇게
살기가 좋아졌기에 하는 말이다. 그와 그의 어미에게는 아직도 그 곳에서 넘어야
할 태산준령이 가로 놓여 있고 건너야 할 깊은 강이 흐르고 있다.
미국은 여기보다 날짜가 하루 더디 간다. 지금 뉴욕은 23일 밤이다. 자고 나
면 새벽 케네디 공항으로 나가 고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것이다. 그것도 이번
에는 어미 없이 혼자. 참으로 좋은 세상이다. 조금 전까지도 그들과 수 차례 통화를
했다. 태평양을 건너면서 날짜변경선을 지나면 25일이 된다.
어디 가는 지도 모르고 어미만 따라 탓던 그 비행기를 10년 만에 다시 타게
되는 녀석의 지금 감회가 어떠할까. 그는 지금 자타가 공인하는 뉴욕 최고
의 명문고등학교 Stuyvesant Specialized Science High School을 다니는 의젓한
학생이다. 녀석을 빨리 보고 싶다.
2010. 12. 24.
林谷齋/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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