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人은 우선 母性을 지닌 美人이어야 한다. 女性은 男性의 고향이다.
남성은 여성의 子宮 속에서 자라 세상에 나와서 母乳를 먹으며 자라난다. 그렇게도 많은 나이든 남성들이 이유기(離乳期)가 까마득한 옛날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가슴을 더듬으려 들고 여성의 자궁을 그리워하는 것은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회귀의지(歸巢本能) 때문이다. 남자라는 존재는 아무리 虛勢를 부리고 腕力을 써본대도 결국에는 女人의 아들일 뿐이다. 따라서 그 떠나온 품을 영원히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여성의 美가 母性을 바탕으로 해야 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基準의 美人들에게서 느끼게 되는 최대의 不滿, 혹은 不安은 視覺的, 外形的, 幾何學的으로는 참으로 예쁜데도 불구하고 母性의 훈훈함과 모성의 너그러움과 包容性 같은 것이 거의 혹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특히 사회적으로 성공한 젊은 여성일수록 모성적 아름다움 같은 것은 정말 찾아보기 어렵다. 유리 細工品 같은 知的인 아름다움, 면도날 같은 날카로운 아름다움은 볼 수 있지만, 다가가서 안기고 싶은 母性의 美는 藥에 쓰려고 찾아도 없다.
다음으로 美人은 조금쯤 內面의 아름다움, 內面의 은은한 빛이 밖으로 풍겨 나오는 미인이어야 한다. 요즘 세상에 그런 미인이 어디 있냐, 外貌도 바쁜데 웬 내면이냐, 그러나 조금쯤이라도 이런 美人을 기대하고 싶다. 또 하나의 美人은 작게라도 자기 삶의 哲學이 있고 올곧은 자기 價値觀이 있고 자기 일에 대한 믿음이 있는 女性이다.
比較의 人生觀을 가지고 化粧品 하나에서부터 시시콜콜 주변 사람과 비교하며 幸福과 不幸을 수시로 넘나드는 여자가 아니다. 光내기 文化에만 젖어서 옷이든 엑세서리든 집이든 드러내기에만 지나치게 급급하지 않는 여자이다. 때로는 나만의 思索空間에서 혼자 音樂 듣고, 혼자 차 마실 줄 아는 여자, 백화점의 고급 브랜드에만 눈길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 줌 햇빛에도, 새로 나온 新綠에도 탄성을 지를 줄 알고 더 나아가 創造主에게 感謝할 줄 아는 女子가 진정한 美人이다.
그리고 가끔은 그늘진 곳에 따스한 視線을 던질 줄 아는 여자이다. 도저히 그런 여자를 현실적으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지만, 사실 그 정도의 조건은 얼굴에 칼을 대는 勇氣의 半만 있어도 누구라도 도달할 수 있는 美의 條件이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여성의 美를 재는 기준이 오로지 외모 일변도로만 흐르기 이전, 예컨대 1960~70년대만 하여도 우리 주변에서 그런 여성을 만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市內 한복판의 카페 골목이나 繁華街의 거리에서 스치는 요즘의 여성들은 정말이지 하나같이 예쁘고 아름답게 보인다. 오뉴월 소낙비를 맞고 선 푸른 나무들처럼 발랄하고 싱싱하기가 그지없다. 간혹은 햇빛 자글자글 끓는 대낮임에도 불끈 性慾을 誘發할 만큼 섹시한 여성들도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이다. 멀리서 볼 때 아름답고 스칠 때까지만 예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그 두 눈을 보며 對話를 나눌 때쯤이면 안타깝게도 그녀들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빛을 發하지 못한다. 플라스틱처럼 香氣가 없다. 內面의 아름다움이 準備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母性의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바라보기에만 예쁜 쇼윈도 人形같은 美貌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멋있는 女性은 많은데도 진실로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수수 덤덤해도 은은하면서 제 그릇에 맞는 그런 아름다운 女性을 보고 싶다. 都市라는 砂漠을 건너며 피곤에 절은 男性들이 찾아가 쉴 수 있는 푸른 그늘과 샘물이 있는 母性의 아름다움을 만나고 싶다. 만날 수 없다면 꿈속에서라도 그리고 싶다.
<가져온 글>
2010. 12. 03.
林谷齋/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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