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계로 아침 9시 7분. 477m 삼성산 정상이다. 짙은 운무로 시계(視界)가 50m도 채 될 것 같지가 않다. 올라 오는 동안에도 꾸준히 오다가다를 반복하던 부슬비가 제법 굵은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미 옷은 젖을대로 다 젖은 상태다. 시계가 점점 더 좁혀 들어온다. 나는 지금 구름으로 둘러 쌓인 공중의 무인도, 하늘을 날으는 섬 나라 – 라퓨타에 갇힌 행복한 로빈슨 크루소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머리 위 국기 게양대에서 펄럭이는 깃발 소리뿐이다. 마치 거센 바람에 나부끼는 성장(盛裝)한 여인의 치마자락 소리 같다.
“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라는 동요의 노랫말을 지은이는 아마 이런 태극기의 모습을 보고 그 가사를 읊었으리라. 이렇게 높은 데서 이렇게 힘차게 펄럭이는 태극기 소리를 들어 보지 않고는 그런 신나는 노랫말이 떠오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삼성산 국기봉의 국기게양대는 대한민국 공군 전우회 서울 금천 지구회에서 1998년 4월 8일에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국기게양대 바로 위에는 ‘산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네파예술산악회’에서 바로 지난해 2009년 6월 12일에 삼성산 국기봉 이라는 정상표지석을 세워두었다. 이 표지석 돌은 아직 전혀 떼가 묻지 않아 엊그제 놓은 듯 글씨도 선명하고 새것 그대로다. 볼 적마다 기분이 좋다. 단정한 젊은 아가씨의 맑고 티없는 얼굴을 대하는 듯하다. 이렇듯 세상 모든 것이 새것이면 좋고 젊으면 좋은데 나이 들어 흉한 몰골을 한 지금의 나는 어쩌면 좋을꼬.
오늘 아침은 조금 늦게 7시경에 집을 나섰다. 어제 저녁은 시내 장충동 남산 국립극장 내에 위치한 조선왕조 궁중음식점 ‘지화자’에서 귀한 손님을 맞아 식사를 함께 했다. 거기서 9시가 넘어 자리를 떴고 다시 남산 2호 터널을 지나 반대쪽 남산 기슭 용산동 집까지 손님을 모셔다 드리고 귀가를 하는 바람에 아침에 늦게 기상을 했다.
역시 구름이 알맞게 낀 하늘이라 아침운동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씨다. 어제와 엊그제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 아침운동을 하지 못했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운동을 나가야 한다. 이틀을 빼먹었으니 그 못한 부분을 보충해야 한다. 목표는 삼성산이다. 빵 두 개와 제일 작은 펫트병 반 크기의 조그마한 용기에 물을 채우고 그것을 허리에 차는 색(sack)에 넣었다. 그만 하면 아침 허기 면하는 데는 충분할 것 같다.
뒷산 자연 전망대, 넓적바위까지는 가는 길에 우연히 동행을 하게 된 어떤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심심찮게 올라갔다. 30년 이상을 이 지역에서 산 토박이이고 아침운동도 부지런히 하는 사람이란다. 나처럼 대머리라 뒤에서 보았을 땐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으나, 알고 보니 나보다는 열 살이나 적은 젊은(?)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한참을 뒤따라 가다 먼저 인사를 하게 되었으니 걸음걸이가 나만큼이나 느린 편이었다. 화제는 주로 건강에 관한 이야기다.
안양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단다. 그래서 수년 전까지만 해도 교통혼잡이 대단했던 모양이나 평촌 신도시 건설과 더불어 지하철이 생기고 고속도로를 포함해서 여기저기 넓은 길이 뚫리면서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해졌단다.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나의 스승이다. 그들에게서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모든 사람이 나의 이웃이요 지인이요 친구다. 그들도 나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웃는 낯에는 침을 뱉지 않는다. 점잖 빼는 것도 좋고 체면도 좋고 근엄, 위엄도 좋고 침묵도 좋다. 그러다간 자칫 새침떼기로 전락할 수도 있다. 줄곧 듣고만 있던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반 정도만 말해도 나이 값에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정상까지는 2시간이 더 걸렸다. 오는 길에 노닥거린 시간이 있어 그렇다. 식이위대(食而爲大)란 말이 있다. 비를 맞아가며 정상에서 먹는 빵 맛이 그야말로 꿀맛이다. 밀가루 음식이 몸에 이롭지 않다는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대개가 맛이 있으니 그 유혹을 어떻게 뿌리치랴. 내일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우선 먹고 보자다. 먹고 죽은 귀신은 떼깔도 곱다 했다. 이러니 어느 세월에 나온 내 배를 밀어 넣겠는가. 목표달성이 지난하기만 하다.
10분이 채 못 되는 시간에 서둘러 요기를 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비는 계속 부슬부슬 내리고 운무는 자욱하다. 내려가는 길은 염불암 쪽으로 잡았다. 왔던 길보다 다른 길이면 덜 지루하다. 그런데 이 코스는 전에 한번 처음으로 다른 등산객 뒤를 따라 올라오기만 했던 길이라 길 찾기가 또 쉽지 않다. 좀 내려가다 보니 길이 여러 갈래다. 여기도 길 같고 저기도 길 같다. 헷갈린다. 설령 약간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 해도 가다 보면 대개 큰 길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은 비상상황이다. 비도 오고 짙은 운무로 먼 데 방향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안산에서 온다는 젊은 등산객 여덟 사람과 지나쳤다. 배낭을 잔뜩 지고 빗속을 잘도 올라온다. 조금 헤매다가 이내 아는 길에 들어섰다. 이제 안심이다. 염불사까지 단숨에 내려갔다. 이게 왠 일인가. 평소 한적하기만 하던 염불사에 당도하니 사람들이 북적댄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음력 7월 초하루다. 초하루와 보름엔 불자들이 불공 드리는 날이다. 대웅전, 염불전, 나한전에 사람이 들어설 틈이 없을 정도다. 높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작은 산신각에도 사람들로 넘쳐난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량의 대수가 대충 70, 80은 될 것 같다. 그뿐이 아니다. 차들이 계속 올라오는 중이다. 주일날 교회에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게 아니다. 절도 마찬가지다.
어디를 가나 우리나라 산들에는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들이 많다. 그런데 그 높은 곳까지 차들이 내왕할 만큼의 넓은 길이 잘 닦여져 있다. 전기가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혼자 궁금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많은 비용이 들겠기 때문이다. 그 궁금증이 드디어 오늘에야 해소가 되는 것 같다.
포장된 넓은 시멘트 길을 연신 비를 맞으며 뚜벅뚜벅 걷는다. 발걸음도 가볍다. 배도 적당히 고프겠다 내려오는 길이니 오죽이나 신이 났으랴. 그런데 내려오면서 보니 얼굴 찌푸려 지는 일이 또 있다. 길가에 모아둔 비닐 쓰레기 봉지들이 죄다 뜯겨지고 터져 있다. 그런 곳이 대여섯 군데는 된다. 절 쓰레기 처리하는 청소차를 믿고 계곡 그늘에 놀러 왔던 사람들이 길가에 버리고 간 것들인 모양이다. 밤 새 산짐승들이 내려와서 그것들을 다 물어뜯어 난장판으로 어질러놓았으니!
곧바로 치우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어떻게 될까. 치울 사람도 당장은 있을 것 같지 않다. 여기는 동네도 아니고 산속이다. 담당 미화원이 배치될 그런 곳도 아니다. 날이 들면 파리떼가 우글거릴 판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이래도 되는 것인가.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이 아직 이정도 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해도 해도 너무하다. 국민의식이 따라가지 못하면 국가라도 나서서 국민을 계도해야 한다. 자기네 집 마당이 그래도 되는가. 차 창을 열고 담뱃재 털고, 꽁초 내던지고, 가래침을 탁탁 뱉어도 말하는 사람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나는 오래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해 본 사람이다. 우리나라 정부 부처 가운데 청소부(淸掃部)를 두는 일 말이다. 내가 청소부장관을 하고. 그런데 누가 시켜줘야 말이지. 참 한심한 일이다. 깨끗하던 유원지도 쓰레기장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더위를 먹었는지 제정신이 아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도랑에 구정물을 일군다. 이 못된 미꾸라지들은 당장 잡아야 한다. 잡아 추어탕으로 만들어 먹기 전에는 고약한 못된 성질은 못 고친다.
국민이 내는 혈세로 국록을 타먹고 사는 공무원들은 도대체 무엇에 쓰려고 그렇게도 많이 뽑아 놓았는가. 시원한 사무실에 앉아 피서 잘 하라고 앉혀 두는가. 장관이고 지사고 시장이 먼저 땀 흘리고 쓰레기 줍기에 앞장서야 한다. 그렇게 해 본 적이 있는가. 그렇게 해 놓고 난 다음 ‘한국방문의 해’를 부르짖고 외국관광객을 불려드려라. 그러면 140억 불 여행적자라는 볼맨 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유원지에 이르렀다. 비가 그치지 않는다. 투명 원통형 고가(高架)보도로 올라갔다. 한 가족이 거기서 식사 판을 벌이고 있다. 아주 멋진 카페요 야외식당이다. “참 보기 좋습니다.”하고 한 마디 건냈다. 그 옆에는 중년인 듯한 여자 두 사람이 앉아 커피를 마시며 비를 피하고 있다. “멋진 카페네요”하고 먼저 인사를 했더니 앉으라며 가져온 귀한 커피를 권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꽤나 흘렀다. 30여분은 지났으리라. 이건 일석이조가 아니고 일석삼조다. 커피 마시고 이야기 하고 비까지 피했으니….. 하기야 벌써 다 젖은 옷인데 비 피하는 일이 내게는 의미가 없다. 마침 교회 이야기가 나왔다. 교회 얘기라면 나도 이제는 끼어들 정도는 된다. 경인교육대 입구에 있는 석수(石水)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한다는 집사님들이란다. 내가 관심을 표명했더니 이야기가 죽이 잘도 맞는다. 다음 주일에는 꼭 그 교회로 나와보란다. 9시 반부터 시작되는 2부 예배 시간에 말이다. 교회라면 어디라도 오라는 데가 많은 게 문제다.
갈 때 한 번 올 때 한 번 중간에 두 번 노닥거린 시간으로 평소보다 한 시간 가까이 더 걸려 집에 도착했다. 11시 40분이다. 왕복 네 시간 반 이상 걸렸다. 배는 고프지 않다. 정상에서 먹은 두 개 빵의 위력 때문이다. 부슬비에 옷은 다 젖었어도 오늘 할 분량의 운동은 다 한 셈이다. 이젠 낮잠을 자도 좋고 놀아도 좋다.
유지나의 “저 하늘 별을 찾아” 가사와 노래를 생각해 본다.
오늘은 어느 곳에서 지친 몸을 쉬어나 볼까
갈 곳 없는 나그네의 또 하루가 가는구나
하늘을 이불 삼아 밤이슬을 베개 삼아
지친 몸을 달래면서 잠이 드는 집시인생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꿈속에서 별을 찾는다
2010. 8. 10
林谷齋/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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