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엔 내일은 중부지방과 경기 일원에 큰비가 내리겠고 모레부터는 다시 폭염이 이어지리라는 일기예보를 듣고 잠자리에 들었다. 한편으론 다소 위안이 되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 걱정도 됐다. 비가 온다는 사실은 불볕더위를 잠시나마 식혀줄 것이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지만, 그 뒤에 계속되리란 폭염이라는 말에는 어딘가 무력감과 위압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렸을 적만해도 겨울 추위보다는 여름의 더위가 차라리 더 견딜만했다. 왜 그랬을까. 그 시절에도 혹한에 얼어 죽는다는 말은 들었어도 염천의 더위로 데어 죽었다는 사람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같다. 굳이 그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사람이 어릴 땐 더위나 추위 등의 날씨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갖거나 민감하지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날씨만큼 중요한 관심사는 없다.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이 든 나도 마찬가지다.
아침운동을 나갈 무렵 하늘은 잔뜩 찌푸린 채 일기예보대로 한줄기 소나기가 당장이라도 막 쏟아질 듯한 기세였다. 그래도 맑은 하늘보단 좋았다. 두 사람이 우산을 하나만 가지고 나갔다. 이미 밤 사이에도 비가 적잖이 내린 터라 산길이 미끄러울 것 같아 망해암 쪽의 넓은 포장길을 택했다. 몇 구비를 돌아 꼭대기 무선항공표지소까지는 비를 안 맞고 무사히 잘 올라갔다.
비 온 뒤의 산길이 참으로 쾌적하고 산뜻하다. 온천지가 세수를 하고 청소를 마친 상태다. 방금 목욕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감고 난 포동포동한 새악시 얼굴을 보는 듯하고 풋풋한 채취를 맡는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이다. 샤워 하고 나오는 젊은 여인의 물기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는가.
아무리 편리하고 성능 좋은 청소기구가 있다 한들 어떻게 온 세상을 한꺼번에 이렇게 말끔히 치울 수가 있겠는가. 살수차로도 어림없고 진공청소기도 안 된다. 썩은 하수로 코를 찌르는 시가지 하천이며, 먼지투성이 거리며, 매연이며 분진 등으로 잿빛이 된 하늘을 무엇으로 씻어낸단 말인가.
답답한 서울 일원의 가시거리(visibility)를 훤히 틔울 수 있는 건 오직 여름철의 호우요 소나기뿐이다. 침침하던 시야가 갑자기 탁 트이는 것보다 더 속을 후련하게 하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헬렌 캘러가 눈을 뜰 수 있었다면 그런 기분일 게다.
위대한 자연의 힘, 오직 비로써만 해 낼 수 있다. 자연의 고마움이여! 자연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했지만 예술은 자연에 미치지 못한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기에 그렇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폭우가 쏟아지는 것도 자연의 조화다. 이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고 섭리를 감사하며 받아들이자. 예로부터 역천자는 망한다고 했다.
40여분에 걸쳐 올라갔는데 정상에 서자 오락가락하던 비가 굵은 빗방울이 바뀌어 뚜덕뚜덕 내리기 시작한다. 아내는 서둘러 내려가잔다. 이미 옷은 땀투성이다. 땀에 젖으나 비에 젖으나 젖는 건 마찬가지다. 차라리 비로 젖는 편이 낫다. 요즘 비는 장마철 자주 오는 비라 더 이상 오염된 산성비가 아니다. 이런 비는 맞아도 괜찮다.
이런 호우에는 우산이 있어봐야 별 소용 없다. 그래도 우산을 받쳐든 아내는 왔던 길로 저만치 서둘러 먼저 내려간다. 나는 이미 옷이 젖을 만큼 젖었겠다 아예 비를 몽땅 맞기로 작심을 하고 평소 다니던 등산로를 따라 아내와 90도 방향으로 빗겨 나 있는 길로 내려갔다. 호우는 계속된다. 한참 동안은 그칠 기세가 아니다. 네거리 갈림길에 내려 섰다. 계속 지름길을 따라 집으로 바로 갈까 아니면 거기서 다시 비봉산 정상으로 올라가볼까 잠시 주저하다 모험을 하기로 맘을 먹었다.
이런 때는 어김없이 내 본연의 오기(傲氣)가 발동한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이른 아침 물에 빠진 생쥐마냥 옷을 조르르 건진 채 산길을 계속 고집하는 미련둥이는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모자도 없이 반바지, 반소매 차림에 오늘 아침은 양말도 신지 않았다. 몰골은 그래도 기분은 개선장군이다.
물실호기(勿失好機)다. 이보다 더 좋은 오기 부릴 찬스가 또 언제 오겠는가. “A
whim a day.”란 Reader’s Digest에 실렸던 짤막한 외국 수필이 생각난다. 사람이 하루에 한 가지씩만 즉흥적이고 엉뚱한 생각대로 살 수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언젠가는 전문의들도 “적어도 하루에 한 가지 변덕을 부려보라(Take a whim
at least once a day.)”라는 기발한 처방을 내릴 날이 오리라.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누구에게 무슨 스트레스며 우울증이 범접을 하겠는가.
퍼붓는 빗줄기에 오르막 산길이 온통 작은 물길 판이다. 생각만큼 미끄럽지는 않다. 비가 처음 내리기 시작할 때 말이지 일단 빗물이 길바닥을 한번 푹 적셔놓거나 씻어가 버리면 괜찮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올려놓는 기분이 스릴 만점이다. 드디어 펑퍼짐한 넓적 바위가 자연전망대를 이루고 있는 팔 부 능선에 올랐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쏟아진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은 고사하고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어렸을 적 비 오는 날 어떤 용건으로 밖에 나가야 할 경우 선뜻 빗속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처마 밑에서 주저주저하고 있을 때면 으레 할머니께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가죽에 물 안 들어간다” 듣기에 따라서는 우악스런 표현 같기도 하지만 참 감칠맛 나는 말이다. 무더위 속 여름 소나기를 맞는 것이 이렇게 상쾌할 줄이야.
열대지방 사람들이 스콜(squall)을 맞는다더니 바로 이런 건가. 웃통은 아예 벗어재꼈다. 고개를 숙이고 등을 하늘로 향해 엎드렸다. 등줄기에 쏟아지는 세찬 비의 촉감, 등물이요 비 마사지다. 모자도 없이 반바지에 반소매 차림, 오늘따라 양말조차 신지 않았다. 머리며 옷이며 등산화가 물투성이다. 그야말로 조르르 건졌다. 그래도 기분은 더없이 좋기만 하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는 반드시 아낙들을 포함해서 여기 바위 위와 벤치에는 몇몇 사람들이 쉬거나 운동을 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나 혼자뿐이다. 이런 악천후 속에 누가 이 시간 여기 청승맞게 비를 맞고 서 있겠는가. 이 훌륭한 산마루 쉼터를 독점하다 라니. 맞은편 삼성산이 운무로 자욱하다. 관악산 정상은 구름 속에 반쯤 모습을 숨겼다. 살다가 이런 때도 있는가. 오래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생긴다더니 오늘 내가 해야 할 말이다.
아이들은 이래서 물줄기 쏟아지는 분수대 안으로 희희낙락하며 뛰어드는 것일까. 노인에게도 동심이 발동하는가. 늙으면 어린 아이가 된다더니 나도 그렇게 된 건가.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데 그 말이 맞는가. 내 무딘 필설로는 이 야릇한 즐거움을 형용키 어렵다. 이 희열을 어디에다 비하랴. 참으로 희한한 경험이다. 일부러 하고 싶어도 이렇게 하기는 불가능하다. 우연이 내게 갖다 준 행운이다. 나는 여러모로 운이 좋은 사람이다. 이 나이에도 이런 희한한 경험을 다 할 수 있었으니. 이런 막연한 희망 때문에 노년도 즐거운가 보다.
2010. 8. 7. 입추 날 아침에
林谷齋/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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