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溪 보시게
오랜만에 옛시절 그리게 하는 좋은글 읽었네.
동심으로 돌아가게 해준 글이어서 더욱 좋았네.
옛적엔 뽕 열매를 우리지방 사투리로 ‘오디’말고 달리 뭐라 부르긴 불렀는 것도
같은데 그 말을 당장은 도저히 기억해낼 수가 없네그려.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다만, 내가 ‘오디’라는 말을 알고 직접 쓰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의 얘기였네. 어디 그뿐이랴, 나로서는 ‘앵두’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나무와 그 열매를 알게 된 것도 마찬가질세.
잘은 모르겠다만 내가 어렸을 땐 우리 집은 물론이요 꽤나 큰 마을이었던 우리
동네엔 앵두나무란 나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네.
사람 눈엔 아는 것 만큼 보인다더니 그래서 내 눈엔 띄질 않았던 겔까.
하기야 비록 앵두나무가 어느 집 밭둑이나 마당 한 구석에 몇 그루 심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보았을 리는 거의 만무했겠고, 탐스런 앵두가 빨갛게 익어 매달렸다 해도 그 날짜가 며칠이나 됐겠으며, 어린 무지렁이 내 눈에 띌 때까지 누가 그걸 그냥 두고 보기만 했겠는가. 상큼한 그 맛을 몰랐을 리 없었을 터인즉.
뽕에 얽힌 사연이야 많던 적던 우리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야 왜 없겠는가.
“남쪽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었네
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고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구슬프고 매력적인 저음 가수 홍민의 노래로 들은 ‘故鄕抄’는 아주 그 뒷날의
이야기이고..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도 그렇고.
자네가 쓴 글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나에게는 좋은 敎本이 되고 있으니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즉시 보내주시게. 참으로 아름다운 포근한 마음의
글이었네.
어제는 경주 사돈 내외를 서울에서 만나 모처럼 오랜만에 며누리, 손자(岷奎)랑
같이 흐뭇하고 즐거운 시간을 여유있게 가질 수 있었네.
인천 송도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제3경인고속도로 경유 외곽순환도로(100번 고속도로)며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끼고 올릭픽대로를 따라 내차로 드라이브도 즐겼네.
분위기 좋고 음식 맛 나는 “산사랑” 이란 이름의 “참으로 괜찮은” 소문난 한식집이
盆堂에서 멀지 않는 성남시 청계산 골짜기 어디에 있네………..
언제 武溪 내외와도 거기를 함께 갈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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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유월
내 고향 유월은 파랗던 앵두가 빨갛게 익어가는 계절입니다.
서너 되도 넘게 해마다 자홍색 과일이 조롱조롱 메어 달리던, 우리 밭둑의 앵두나무는 누군가가 분재용으로 탐이 났던지 지난 겨울에 땅을 파고 뿌리 통(?) 만 잘라갔습니다.
해마다 앵두 즙을 담그던 생각이 나(서) 올해는 시장에서 잘 익은 앵두를 한 됫박 샀습니다. 그리고 마침 곁에 오디도 보이길래 그것도 같이 조금 샀습니다. 옛 문헌을 보면 뽕나무 열매로 담근 술을 상심주(桑心酒)라 해서 강장재로 쓴다고 했기에 처음으로 오디술도 담가 볼 생각입니다.
젊고 싱싱한 아름다운 여인의 입술을 가리켜(서) ‘앵두 같은 입술’이라고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탐스럽고 고운 여인의 입술을 (가리켜서) ‘앵두 같은 입술’이라 했는지 어렵게 생각하지 아니 해도(않아도) 새빨간 앵두를 보기만 하면 누구나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될 것입니다.
소만(小滿)이 지나고 망종(忙種)이 하지(夏至)라는 절기와 교차하는 계절이 되면 고향(의) 산비탈에서는 줄 딸기가 빨갛게 익어 갑니다.(가는데) 그걸 한 움큼 따서 입안에 넣으면 새콤(하고) 달콤한 맛의 조화는 (이루 형용하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오늘날 (어느) 백화점의 그 어떤 주스로나 과일로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팔진미(八珍味)에 곁들인 오후청(五侯淸)을 능가하는 맛입니다.
(이 단락은 한 문장으로만 처리가 되어 있어 너무 긴 듯합니다. 그래서 직독직해가 가능하도록 끊어보시면 어떨지?그리고 조사를 생략해도 무리가 없을 땐 오리려 함축 의미가 있어 좋을 듯도 싶어서)
앵두가 익으면 오디도 따라 익을 때이고 덤불 딸기도 연달아 한창 익을 시기입니다. ‘오디’라고 하면 뽕나무에 달리는 까만 열매를 말합니다. 요즘에서야 몸보신에 좋은 과일(실과?)이라고 해서 도시 사람들 극성에 남아나지도 않는답니만, 우리가 자랄 옛적엔 목돈을 만지기가 어려웠던 시절이고 경제적으로도 빈약했던 시골이고 보니 그래도 한 달 동안 뽕 잎으로 누에치기를 하면 당시로서는 그나마 급한 것 한숨 돌릴 수 있는, 제법 큰 몫 돈을 만질 수 있었던 양잠도 이젠 다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도 너무 긴듯한 한 문장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뜻이 명쾌하지 않습니다. 윗 이야기의 흐름과 연결이 매끄럽지 못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다시 더 쉽고 부드럽게 처리해서 보내주시면 ….) 우리들의 학비가 되고 교통비가 되고 신발이며 옷가지와 일용품을 샀던 귀한 재원이었던 뽕나무가 이젠 괄시를 받다 못해 폐기되고 있습니다.
“머리 길고 키 큰 처녀 울뽕나무에 걸앉았네,
울뽕 줄 뽕 내따 줌 세 살림살이 나 캉 하자!”
장가 못 간 노총각의 애환을 담아 모내기 노래 가사로도 등장하는 이 뽕나무는 언제부터인가 천덕꾸러기가 되어 잘려지고 뽑혀져 지금은 버려진 폐농의 전답이나 산비탈 밭둑에서 자라고 있는 노상(老桑)에서나 딸 수밖에 없는 오디랍니다.
줄줄이 열어대는 덤불 딸기밭으로 소문이 나 있던 산비탈은 서울에 있는 누구네의 회사에 팔려(서)그 허리통이 잘려 무슨 용도로 쓰이게 되고, 앵두며 자두며 산수유가 넓은 밭둑을 꽉 메운 뽕밭은 또 어느 도시(의) 무슨 사장에게 팔려(서) 호화분묘지로 (탈바꿈했고)가 됐고, 놀이터로 일 년 내내 어린이들의 모임 장소였던 마을 앞(의) 연못은 잡석으로 매립을 해서 주유소가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이제 사라져 가는 것은 추억 담긴 산야나 환경만이 아닙니다. 논과 밭, 뽕나무, 호두나무, 앵두나무만도 아닙니다. 어린 시절 우리들의 가슴에 화려한 꿈을 그리던 수채화의 물감마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디를 따 먹다 보면 온통 입이며 손이며 옷에까지 검붉게 황칠을 해대던 뽕나무 열매! 그 오디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내 고향 산비탈 동리는(의) 유월이면 온 산천과 들길을 하얗게 덮은 찔레꽃이 유난히도 곱게 피는 마을이기에 (내고향 산비탈 동리가 이 문장의 주어가 되어야 하겠기에 주격 조사 “는”을 써본 것입니다.)
그 찔레 새 순 잘라 그 줄기 껍질 벗겨 씹어 먹던 쩝쩝하고 시금털털한 맛도 생각이 납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간드러지게 배꼽 잡고 나뒹굴(었)던 그 웃음들을 심장 깊이 묻어 두고 살아갑니다. 세상살이 힘들고 지칠 때 남 몰래 꺼내 향수를 달래려고 혼자 불어 보는 보리피리의 추억마저도 아련하다 못해 가물가물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영혼을 풍요롭게 해주던 옛 추억이 자라던 흔적들이 하나하나 없어져 가는 것이 내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한때 유행했던 어느 대중가요의 가사 구절입니다. 유행가 속에서는 동네 처녀가 왜 바람이 났는지 통 모를 일입니다. 만, 앵두나무가 심겨져 있던 동네 우물은 오래전에 간이 상수도에 밀려 없어진지가 한참이나 되었습니다. 이제 어딜 가나 시골 동네에는 바람이 나고 안 나고는 다음으로 치고 눈을 닦고 봐도 처녀는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습니다.
흘러가버린 과거, 아득한 옛날의 추억, 어릴 적의 소꿉놀이 친구들, 고향이 있었기에 추억이 있고, 그리움이 있기에 눈을 감으면 내 영혼이 안식할 수 있던 정든 산천과 그 환경들! 어릴 때의 온갖 추억이자리하는 그 언덕이 모조리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유월을 맞으면서 내 생애에 몇 번이나 더 앵두 즙을 담글지 모르지만 앵두가 익어 가는 계절이기에, 추억만 먹고 있(살)기가 서글퍼서, 또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도 적잖이 서러워서, 해마다 이맘때면 무슨 의식(이라도)을 치르듯이 유리병에 차곡차곡 앵두를 채웁니다.
변(해가)하는 세상따라 사람도 변하고 때가 오면 세월따라 모든 게 가고 마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새빨간 앵두 속에 비쳐지는 고향이 하도 그리워서, 오뉴월이면 산바람이 녹음을 안고 이글거리던 산 아래동(네)리의 달콤한 추억의 향(香)을 섞어 내 가슴 병(甁)에도 앵두를 채웁니다. 고향 맛이(내음) 물씬 나는 산천과 훈풍을 고향 하늘에 떠 있던 흰 구름에 둘둘 말아 가슴 안 막창부터 차곡차곡 채웁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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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글을 용훼(容喙)한다는 것이 예의가 아닌 줄은 알고 있네. 그래도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는 말을 믿고 무관하게 短想을 일관성도 없이 대충 봉사 삼 밭 지나가는 격으로 몇자 적어본 것일세.
참새가 어찌 봉황의 깊은 뜻을 알까. 난 무계 자네의 깊은 속을 헤아릴 수 없네.
그래도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니 등엔 땀이 흐르고 시간은 잘도 가네.
열 번을 보면 열 번 다 다시 손 봐야 하는 것이 글인즉 언제나 미완성의 작만 남게
되는가.
오를도 더위가 대단하이,
슬기롭게 오늘 하루도 보내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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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6. 10:00
林谷齋/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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