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권력이 있으면 은둔(隱遁)이 있다. 권력에서 내려와 은둔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죽어야 하거나 아니면 병이 들어 인생을 마감한다. 정보부장을 지냈던 이후락은 이천의 도자기 공장에서 수십년 은둔한 탓에 천수를 누렸지만, 김형욱은 미국에 도망가 숨어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결국 파리에서 죽었다.

은둔에는 2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첫째는 인생이 결국 공(空)하고 허(虛)한 철리와, 권불십년(權不十年)의 이치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준비이다. 그래야 우울증에 안 걸리고 병에 안 걸린다. 둘째는 은둔할 장소를 평소에 물색해 두어야 한다. 조선시대 권력가들은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구곡(九曲)을 만들어 놓고 은둔한 사례가 있다. 정권을 잡았다가 뺏기는 상황이 반복되는 숙종조 무렵에 살았던 장동(안동) 김씨 장손인 김수증(金壽增·1624~1701)은 강원도 화악산 골짜기에다 곡운구곡(谷雲九曲)을 만들었다.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였을 때는 강원도의 곡운구곡에 숨어 들어가 쓰라린 마음을 달래고, 집안을 유지하며, 후일을 기약했다.

30년 동안 오로지 곡운구곡의 은둔 문화를 연구하여 근래에 후학들과 함께 ‘권력과 은둔’을 펴낸 유준영(75) 선생의 안내로 지난주에 이 구곡을 답사해 보니 과연 깊은 골짜기였다. 구곡 가운데 제 오곡(五曲)의 바위에 김수증이 글자를 새긴 천근석(天根石)과 월굴암(月窟巖)은 송나라 때 학자 소강절(邵康節)의 상수학(象數學)의 요체를 말해주고 있었다. 즉 은둔하면서 가만히 놀지 않고 주역에 심취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운수(運數)가 나쁘니 숨어 있다가 언제 다시 운이 오는가를 연구하였음을 말해준다.

중국의 주자도 수(數)틀리니까 무이산에 들어가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만들어 놓고 주역을 연구하며 말년을 보냈다. 율곡도 황해도 수양산 자락에 고산구곡(高山九曲)을 만들었고, 김수증의 선배이자 노론의 최고 보스였던 송시열도 여차하면 괴산군의 화양구곡(華陽九曲)에 들어가 운기조식을 취하였다. 곡운구곡을 보니까 은둔에도 품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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