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휠체어에 앉은 채로 준공된 영락교회 50주년 기념관을 돌아보고 있는 고 한경직 목사. 3년 뒤인 2000년 4월 19일 그는 소천했다.

1997년 휠체어에 앉은 채로 준공된 영락교회 50주년 기념관을 돌아보고 있는 고 한경직 목사. 3년 뒤인 2000년 4월 19일 그는 소천했다.

어느 바보 목사님을 그리워하며

그는 참 바보처럼 살다 가셨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 수 있었는데도,
그는 바보처럼 좋은 옷 대신에 소매가 닳아빠진 옷을 입었고
멋진 차 대신에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가장 안락한 아파트에 살 수 있었는데도
바보같이 그것을 마다하고,
“월셋방에 사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산꼭대기 20평짜리 국민주택에 들어갔습니다.

교단(敎團)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도,
바보처럼 그는 그것을 버렸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교회를 대물림해주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바보같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먼 외국으로 쫓아버렸습니다.

강연, 집회 , 심방, 주례 등으로
짭짤한 부수입을 올릴 수 있었는데도,
바보 같은 그는 수많은 강연, 집회, 심방, 주례를 하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한 푼도 모으지를 못했습니다.

설교집과 자서전을 팔아
큰 인기와 재산을 얻을 수 있었는데도,
바보 같은 그는
“성경 하나면 되지 뭐” 하면서
도무지 그런 짓을 하려들지 않았습니다.

안수기도와 방언, 신유와 부흥회의 열광적인 분위기로
엄청난 카리스마를 누릴 수 있었는데도,
그는 바보처럼
자신이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고
늘 스스로를 탓할 뿐이었습니다.

새카만 후배들이 통일 운동에 앞장선다면서
가로막힌 북녀 땅을 제집 드나들 듯 마음대로 들락날락하며
헤어졌던 가족 친척들을 은밀히 만나고 다닐 때도,
그는 참 바보처럼
“저 많은 실향민들이 고향엘 가지 못하는데,
어찌 나 혼자만 가겠는가” 하면서,
그리운 고향 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정의감 넘치는 이들이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데모하고 감옥 갈 때
총칼 든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주고는
정말 바보처럼
욕만 실컷 얻어먹었습니다.

사자후(獅子吼) 같은 명설교도,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감동적인 웅변도 할 줄 몰랐던 그는,
그저 바보처럼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손과 발로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설교하고 선포했을 뿐입니다.

고난주간에
이름 있다는 목사님들이
대규모 부활절 연합예배의 설교와 기도 순서를 맡으려고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닐 때,
바보 같은 그는
고난주간을 채 넘기지 못한 채,
고난 속에 살다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입(口)’ 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발(足)’을 가졌던
이 바보 같은 목사님의 이름은
한경직(韓景職)입니다.

이 바보 같은 이름은, 그러나
너무도 똑똑하고 성공적인 목사님들이 이름을 드날리는
오늘날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그리운 이름으로,
가장 진실한 이름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서울고법 부장판사 이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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