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목 오릿과의 기러기는 북반구의 겨울 철새로서 봄에 날씨가 풀려 번식기가 되면 무리 짓는 습성을 버리고 암수가 짝을 지어 떨어져 나와 땅 위에 간단한 둥지를 틀고 살림을 차린다. 둥글고 표면이 거친 하얀 알을 3∼12개 정도 낳는 데 포란기간은 24~33일, 이 때 수컷은 알이 부화될 때까지 둥지 주변을 지키면서 아빠 노릇을 톡톡히 하고, 그렇게 해서 부화된 아기 기러기들은 그 해 여름만 엄마 아빠의 보살핌을 받은 후 둥지를 떠나 스스로 살아간다. 그런 기러기들은 한 번 짝을 지으면 두 번 다시 짝을 짓지 않고(不再偶), 추울 때와 더울 때를 가려 이동함으로써 자기 몸을 보전할 줄 알고(知保身), 날아갈 때 대오나 위아래 서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不失其序), 자기들 끼리 다투지 않고 화기애애하게 지낸다(以就和氣)고 하여 자고로 신조(信鳥)로 불렸다. 그래서 한자문화권에서는 혼례를 올릴 때 신랑이 나무 기러기[木雁]을 비단보에 싸서 가지고가 신부 가족이 보는 앞에서 북쪽을 향해 두 번 절을 올려 백년해로를 서약하는 전안례(奠雁禮)가 전통으로 굳어졌었다.

사실 기러기의 이미지가 그리 썩 좋은 건 아니다. 불륜이 횡행하는 인간세상에서 기러기가 한번 짝을 맺으면 끝까지 정절을 지키는 습성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썰렁한 가을 저녁 하늘을 떼지어 날아다니는 기러기 떼나 끼룩끼룩 짝을 찾아 헤매는 외기러기를 보면 기러기 부부가 되고 싶은 생각이 싹 가시기도 한다. 일찍이 난리 통에 타관객지를 떠돌던 시인 두보도 “외기러기 먹지도 쪼지도 않고(孤雁不飮啄)/ 날아올라 울면서 무리를 찾는구나(飛鳴聲念羣)”하고 읊었었고, 한국서도 먹고 살기 위해 가족이 생이별 하던 1969년 가수 이미자가 구슬픈 음색으로 “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 산새도 슬피우는 노을 진 산골에/ 엄마구름 애기구름 정답게 가는데/ 아빠는 어디 갔나 어디서 살고 있나/ 아아아-우리는 외로운 형제 길 잃은 기러기”라고 노래 불러 수많은 여인네들의 옷고름을 적셨듯이, 시인묵객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기러기들은 대부분 처량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기러기 아빠’가 한국서 뼈 빠지게 돈을 벌고 있는 동안 자식 뒷바라지를 핑계로 미국에 건너온 일부 몰지각한 ‘기러기 엄마’들이 현지 남자들과 불륜을 일삼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 최근에도 로스앤젤레스 거주 한 미국인 남자가 ‘기러기 엄마’들이 자주 접속한다는 모 웹사이트에 자신이 성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는 8명의 한인 아줌마들의 얼굴사진을 올려 한인타운이 발칵 뒤집어졌다. 실제로 그런 남자가 실존하는지 확인을 해본 사람도 없고, 누군가 가십성 기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겠으나, 지금껏 그런 일이 비일비재 했었기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하고 눈살 찌푸리는 사람들이 많아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이곳 뉴욕에서도 ‘기러기 엄마’를 주고객으로 하는 비밀 호스트바가 성업 중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도는 것을 보면 이번 일 또한 헛소문만은 아닌 듯싶다.

몇 해 전 똑 같은 코스(?)를 거치면서 아내와 이혼하고는 자식을 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뉴욕을 방문했던 한 친구의 회한이 곱씹어진다. 자신이나 아내나 진정으로 자식을 위해 ‘기러기 가족’이 됐던 게 아니라 부부 권태기를 극복하지 못한 나머지 서로로부터 풀려나기 위해 자식을 미국으로 조기 유학 보냈었으나, 자신이 한국에 혼자 남아 해방감을 만끽하면서 술집여자들과 노닥거리는 동안 아내 또한 미국서 외롭다는 핑계로 다른 남자를 만났었고, 스치고 지나가는 술집 여자와 어울렸던 자신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자신보다 더 멋진 한인 사업가를 만나 어울렸던 아내는 다시 돌아올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아 결국은 이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 친구가 술잔을 연거푸 비우고 나서 길게 내뿜는 담배연기가 어디론가 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밤이 깊어 손님 끊긴 텅 빈 소줏집 천정에 울려 퍼지던 그의 술주정은 끼룩끼룩 기러기 울음소리보다도 더 구슬프고 처량했었고.

2010. 1. 29.
채수경 주필기자– 미주세계일보

787 total views, 1 views 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