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입구마다 새봄이 왔다고 연분홍 벚꽃과 노란 개나리들이 쳐놓은 현수막들이 이쪽저쪽에서 아우성이건만, 한 겨울의 동장군은 예의 얼음장 같은 싸늘한 기운을 거두지 않은 채 시샘바람 속에 숨어 무익한 투항을 계속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동장군! 그동안 네 임무를 잘 마쳤으니 이제 자랑스러운 명예제대 하게나”, 하시고 만물의 봄 여왕을 위한 꽃길 준비를 이미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다가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해 전세는 동장군에게 훨씬 더 불리해졌다. 백전불굴 동장군은 오늘 안으로 백기를 들지 않으면 남은 군대는 봄비부대에 의해 초토화될 것이다.

한 시간도 안 되는 학교 앞 타운하우스에서 친구들과 함께 사는 광철이는 가끔씩 시간이 날 때마다 와서 우리를 보고 한식을 먹고 간다. 아들이 온다고 하면 나는 갑자기 기분도 좋아지고 바빠진다. 무엇을 해줄까 머리도 바쁘게 돌아간다. 지난 주말에 와서 저녁을 같이 먹고 소파에 앉아 놀 때, 광철이가 “엄마, 엄마에게 좋은 소식 있어.” “뭐? 어-엉? 너 걸프랜드 생겼구나? 맞지?” 그럼 내가 그거 하나 못 맞힐라고… 올 때마다 늘 연애교육을 시켰는데… 지금은 광철이가 대학 3학년을 새로 시작한 학기 중이고, 애나는 아틀란타에서 전학을 와서 학교 안의 크리스찬 클럽에서 만났다고 했다.

딸 나리와 나, 남편, 우리 셋은 모두 다 흥분했고, 나리는 재빨리 오빠 인터넷사이트에 들어가 걸프랜드의 사진을 뽑아냈으나 다 친구들과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은 사진밖에 볼 수 없어서 이내 실망했다. “어떻게 생겼어? 예뻐?” “어엉, 그냥 그래.” “니가 좋아해? 걔도 너 좋대?” “같이 데이트도 했어?” “어엉, 어엉,” 성격이 꼭 필요한 얘기 말고는 입을 잘 열지 않는 아빠를 닮아(구시대에 태어났음 칭찬받을 성 싶은) 이것이 그 날 우리 아들에게 처음 생긴 걸프랜드에 관한 대화의 전부였다.

이 날은 토요일이어서 남편과 나는 집에 종일 있을 생각이었고, 광철이가 오늘 애나를 데리고 점심에 온다고 들었던 차라 가까운 ‘샘스’에 가서 스테이크고기를 사다놓았다. 아침부터 남편과 나는 애들 얘기는 안 했지만 우리는 각자 약간씩 흥분하고 있었다. 실은 광철의 첫 걸프랜드인 애나를 이번주 화요일에 남편 오피스에서 잠깐 본 적은 있었다. 둘이서 시간을 내 점심을 먹으러온 김에 들르겠다고 전화를 하고 왔었다. 그 때 나는 뭐 맛있는 간식이라도 사다줄까 하고 잠깐 한아름에 내려간 사이에 와있었다.

애나는 키가 자그마하고 (우리 애들은 다 큰 편) 눈은 동글동글하고 반짝반짝, 코와 입은 오목하고 귀엽고, 아담한 몸매에 화장기도 없이 수수한 코트를 입고 있었다. 수줍은 듯 밝게 미소를 띠고 말하는 태도가 착하고 야무져 보였다. 광철이가 나리를 만나러 간다고 해서 잠시 서서 인사만 나누었다. 마침 사무실에 같이 있던 미세스 조께서 먼저 보시고는 저렇게 야무진 애를 데려오다니 광철이가 보통이 아니라며 칭찬해주니 기분도 좋았고 나도 기대했던 처음 만나보는 우리 아들의 처음 여자친구가 내 맘에도 들었다.

광철이가 대학교에 갈 때에 엄마로서 내가 거듭 강조해 준 명언은 “캠퍼스에 있을 동안에 꼭 연애를 해야하느니라, 아니면 예쁜애들 다 놓친다” 였다. 앞부분은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사실이고 뒷부분은 협박이었다. 이 어미의 깊은 뜻은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세상만사에 다 때가 있더라, 어렸을 때는 맘껏 놀고, 공부할 때 공부하고, 연애도 때를 놓치지 말고 부디 멋진 연애를 해보라는 것이다.

캠퍼스는 상아탑을 꿈꾸는 젊은이들만이 활보할 수 있는 특별지대이다. 그들의 지성은 높고, 마음은 순수함으로 뜨겁다. 그들의 이마는 열정으로 빛나고, 눈빛은 깊고 푸르며, 입술은 향긋한 꽃잎과 같고 달콤한 향기를 뱉는다. 그 특수집단의 세계에서 그들만이 교감할 수 있는 젊은이들의 순정은 또한 동서고금을 통하여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것인가, 그것을 놓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숨겨 놓은 선물 중의 하나를 놓치는 것이다.

봄비는 온 종일 바시락대며 기분좋게 내리고 나는 집안분위기를 쇄신하며 시간에 맞추어 점심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대화를 나누며 어떻게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갈까 나 혼자 즐거운 상상을 하며 보냈다. 생각이 깊어져 처음 보이프랜드의 집에 간다면 보이프랜드의 엄마에게 작은 꽃다발이라도 가지고 가지 않을까 내심 작은 꽃다발이라도 받는 데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리며 “엄마 나 왔어.” “그래”하고 부엌에서 나오니 벌써 둘은 “안녕하세요?”인사를 마치고는 나리가 있는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작은 꽃다발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이고, 네 녀석이 그렇지. 네가 그런 센스라도 있으면 예전에 걸프랜드가 있었겠다. 그리고 과대망상증이 심한 나도 그렇지, 신부 인사하러 온 것도 아닌데….” 이내 누추한 생각을 떨치며 광철이와 애나를 반겨 맞으니, 방금 김치국 마신 내 속마음을 모르는 애나는 다가와서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애나가 우리 아는 분의 친구의 딸이라는 것도 알게 되어 반가웠으며, 광철이와 애나의 성격과 취향이 조용하고 차분한 쪽으로 잘 맞는 것도 알아냈다.

봄비에 촉촉이 젖어드는 연초록 뒷마당을 바라보며 토요일 정오의 식탁은 재밌는 이야기와 맛있게 구운 스테이크로 즐거웠다. 광철이가 여자친구와 나란히 앉아 속삭이며 도란거리는 모습을 즐거이 바라보는 중에 나는 갑자기 그 장면이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졌으며 약간의 허전함마저 잠시동안 내 마음에 머물렀다.

아마도 처음 보는 풍경 때문일 것이다. 이 새롭고 경이로운 풍경이 젊은 연인들 어깨너머 멀리 숲속에 막 기지개를 펴며 노래하기 시작한 나뭇잎들에게서도 보인다.
광철이의 첫 걸프랜드 예쁜 애나와 앞으로도 계속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전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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