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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banon-Beirut  레바논의 대표적인 해변풍경으로 베이루트에 있는 피죤락(Pigion Rock).

우리나라 경기도 면적에 인구 4백만명의 작은나라. 이스라엘의 솔로몬왕이 레바논의 백향목을 가져다 성전을 건축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상이 상술에 뛰어났던 페니키아인들로 지중해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활발한 교역으로 매우 부유하였다.

영어의 알파벳의 모태가 된 페니키아어를 만들었으며 현재 이슬람과 기독교를 위시하여 18개의 종파가 있다고 한다.  중동에서 유일하게 대통령이 기독교인이며 기독교인은 대략 40%이고 이슬람이 60%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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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로마 황제들은 제국 후기와 비잔틴 시대(300∼634경) 동안 이 지역을 보호했다. 6세기 시리아에서 박해를 피해 도망친 그리스도교도들이 지금의 레바논 북부에 정착한 다음 원주민들을 흡수하여 마론 교회를 세웠다. 7세기에는 이슬람교도가 시리아를 정복한 뒤 아랍 부족민이 레바논 남부에 자리를 잡았다. 400년 뒤 이 아랍인 무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드루즈교로 신앙을 바꾸었다. 해안도시에서는 주로 수니파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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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말 레바논은 십자군이 세운 나라들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뒤 시리아와 이집트를 지배한 맘루크 왕조에 속하게 되었다. 15∼18세기에 레바논은 고유의 사회적·정치적 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 기간에 유럽의 영향이 증가했는데, 특히 프랑스의 영향이 컸다. 1516년 오스만 투르크가 맘루크를 대신해서 레바논을 지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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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들이 늘어나면서 사회적으로 심각한 갈등이 야기 되었다. 1842년 오스만 투르크가 드루즈파에 속하는 시하브가(家)의 지방통치를 종식시키자, 사이가 나빴던 마론파와 드루즈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들의 반목은 1860년 드루즈파가 마론파 그리스도교도들을 학살함으로써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이때 그리스도교도들을 위해 개입한 프랑스가 오스만의 술탄을 압박해 오스만 제국에 있는 레바논 산으로 알려진 지역에 그리스도교인들의 산악 자치주를 만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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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레바논은 처음에 프랑스 군정의 통치를 받았는데, 1923년 국제연맹이 정식으로 시리아와 레바논의 통치를 프랑스에 위임했다. 1945년 프랑스가 물러가고, 1946년말 레바논은 완전히 독립했다. 이때부터 독립 레바논 정부는 1943년에 이루어진 국민협정이라 불린 구두 합의에 따라 운영되었다. 이 국민협정은 상이한 종교집단들이 국가와 행정기관에 동등한 대표권으로 참여한다는 원리를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마론파 그리스도교도, 총리는 수니파 이슬람교도, 국민의회 의장은 시아파 이슬람교도에서 뽑는 것이 관행으로 되었다. 그리스도교도가 근소한 우위를 차지한 이 권력배분안은 레바논이 독립한 첫 20년 동안 무리없이 잘 시행되었다. 레바논은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경제적으로는 중동의 금융과 상업의 주요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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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76년 이슬람교도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도들과 전투를 벌이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이 싸움에서 그리스도교도가 밀리기 시작하자,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개입과 레바논 내의 그리스도교도들의 세력약화를 막기 위해 레바논에 약 2만의 군대를 보냈다. 1976∼82년 수천의 시리아 군대와 국제연합의 다국적군이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 이스라엘 사이에서 정전유지에 힘썼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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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범아랍주의에서 힘을 얻고 그리스도교 주민보다 자신들의 인구 증가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안 레바논의 이슬람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미국 군인의 도움을 받은 중앙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레바논은 평온을 되찾았으나 이슬람교도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슬람교도들은 국가와 행정기관에서 그리스도교도의 비중이 지나치게 크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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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49년의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수십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레바논 남부의 난민촌에 다시 정착했다. 1970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요르단에서 쫓겨난 뒤 레바논으로 본부를 옮겨 군사활동을 계속하였다. 1970년대초 PLO가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 북부를 여러 차례 습격하자 그리스도교가 우세한 레바논 정부는 레바논 땅에서 PLO의 군사활동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갈등이 심해지면서 PLO는 레바논 이슬람교도들을 지지하게 되었다. 1975년에 이르자 이슬람교도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연합해 그리스도교도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만큼 갈등이 노골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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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76년 이슬람교도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도들과 전투를 벌이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 레바논 내전). 이 싸움에서 그리스도교도가 밀리기 시작하자,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개입과 레바논 내의 그리스도교도들의 세력약화를 막기 위해 레바논에 약 2만의 군대를 보냈다. 1976∼82년 수천의 시리아 군대와 국제연합의 다국적군이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 이스라엘 사이에서 정전유지에 힘썼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1982년 6월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남부의 팔레스타인 군대를 몰아내겠다는 선언을 하고 레바논으로 진격했지만, 1985년 레바논 종교집단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철수했다. 이때까지 주기적인 내전으로 여러 곳이 파괴되었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주민의 절반이 넘는 이슬람교도들과 주요정부기관을 계속 지배하려는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 서로가 만족할 만한 정치적 타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레바논에서는 마론파 그리스도교도,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교도, 팔레스타인 게릴라 및 드루즈파 사이에 대립이 계속 되었다.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의 타이프에 모인 의회의 구성원들은 마론파 그리스도교 대통령, 수니파 이슬람교도 총리, 시아파 이슬람교도 국민의회 의장에 합의했고, 총리와 국민회의 의장의 권리가 확대되었다.

15년 간의 내전으로 도시가 황폐되었던 것을 다시 재건해서 어제와 오늘을 사진으로 확대해서 도심의 거리에 전시해 놓았다.  이것을 보면서 왜 한국은 6.25전쟁의 어제와 오늘을 이와같이 전시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아픈 과거를 교훈삼아 다시는 이런 동족상잔의 비극이 없길  바라는 교육으로 이런 시각적 전시가 매우 중요한 것 같아 잠시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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