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교회)에 나갔더냐”
Beholding and Healing
Humble and No reputation
Justice for truth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이사야 42장 1절~4절)
과학이든 예술이든 …
응용과학과 응용예술이 각광을 받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존재를 묻는 철학보다는 …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가라는, 처세방법을 제시하는 책들이
더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세상이다.
교회속에서, 그리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이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성서의 말씀보다는 … 상담학 이론이 더 중시되고,
기도가 무엇인가라는, 물음보다는
축복받는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책이 더 많이 읽힌다.
그가 누구인가(Who He is) 라는 주제는, 더이상 기독교인들의 관심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어떻게(How to be) 가 더 중요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성서는, 그가 누구인가를 보라(Behold)는 말을 끊임없이 기록하고 있다.
위에 기록한 이사야서의 말씀은(The Servant of the Lord)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구절로서, 신학교의 졸업식장에서 자주 낭독되는 것이다.
성서의 본문이 “나의 종을 보라”고 했듯이,
그리스도인은 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바라본다는 것은 그를 닮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이 말하는, “외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소리가 거리로 들리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높거나 격한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하여도 되지만 …
본래의 의미는 ‘그는 겸손하며’ 혹은 ‘그는 이름이 없으며’로 해석해야 옳은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을 빛으로도 비유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보면
죽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땅에 …
자기를 비어(이름도 없이 / of no reputation)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의 모습으로 왔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어(humbled) 죽기까지 복종을 하였다고 빌립보서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을, 태양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면,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달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인 역시도, 세상속에서 달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반사하는 밝은 존재 …
누구나 바라볼 수 있는 포근하고 아름다운 모습 …
그것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결혼식을 치루고 사는 관계이기 때문에, 혹은 잠자리를 같이 하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라고 한다면,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옳은 말도 아니다.
그것은 사실(fact)일 뿐이지, 진실(truth)은 아니다.
남편과 아내에 관한 진실된 설명은 …
그를 아끼며, 그를 치유하고, 평생을 그와 함께 살기로 약속을 한 …
그런 사람이라는 해석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
교회에 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상한 갈대나 끄으름이 나는 등불을 끄지 않았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이 땅에 교회를 가져왔다거나, 복음을 전했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3년간 이 땅에서 많은 이적을 행하였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그 이적은, 예수 자신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
인간 예수가 이 땅에서 행한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
그것은 치유(healing)라고 말해야 한다. 치유란 …
그가, 본래의, 그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치유는 꺾거나 끄지 않는 것이 그 시작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행해야 하는 것도 …
복음의 전파가 아니라, 치유여야 한다.
가정과 일터에서의 치유 –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상한 갈대이고, 끄으름이 나는 등불이기 때문이며 …
그리스도는 상처받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이기 때문이다.
치유는 아끼는 마음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
치유의 능력은, 병고치는 은사가 아니고, 사랑의 있고 없음이다.
바울도 말하기를 …
성령의 열매는, 방언이나 예언이 아니고, 사랑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랑이 있든 없든 …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을 빼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그러나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
기도를 위한 기도일 가능성이 너무도 크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은
사람에게 품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성서구절은 몰라도 …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구절 만큼은 외우는 것이 좋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
“사랑하기 원합니다” 가 아니고 –
“오래 참기를 원합니다” 라고 구체적으로 간구해야 한다.
기독교의 시작이자 끝인 사랑 …
그 사랑은 늘 공의와 함께 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사랑과 공의인 것처럼 –
그러나 우리의 교회는 공의가 빠진 사랑을 말하기 때문에 …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사람들과 입만 구분이 된다고 비판 받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 4절~7절)
J 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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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주 중앙일보 블로그에서 <마음의 창>이라는 이름으로 올린 글을 퍼온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온 몸에 전률을 느꼈다. 단순명료한 글이 나의 영혼을 울린 것이다. <마음의 창>님께 감사를 드린다.
또한 그 분의 댓글 중 이런 표현도 있다.
“개신교는 원래, 영적 지도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만인 제사장설이 그것입니다. 카톨릭은 신부(사제)가 영적 지도자이지만, 개신교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직접 소통된다고 주장하지요. 그래서 개신교의 목회자는 지도자가 아니라, servant 이어야 맞습니다.”
다시 한번 <마음의 창>님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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