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hamas Family Vacation

nassaucruiseport

2003 년7월은 막내 이모님의 환갑이 되는 달 (Month) 이다. 이종사촌 여동생인 릴리(Lily)가 자기 어머니 60회 생일 기념으로 바하마 유람선 여행을 할 예정이니 같이 갈 의향이 있는지를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와는 12살이 차이가 나지만 두 분은 너무나 친하게 지내셨었다. 사랑하는 막내 이모님은 제일 먼저 미국에 오셔서, 인자한 마음으로 집안을 챙기시고, 또한 경제적으로 일가친척에 공헌해오신 분이며, 모든 친척들에게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시니, 같이 여행 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나의 아버님까지 합세를 시켰다.  가능하면 여러 일가 친척들과 함께 가기를 원했지만 각 가정의 사정도 있고 해서, 결국 5가정, 총13 명이 같이 가는 가족 여행으로 가닥이 잡혀졌다.

우 리 아버님과 새 어머니, 이모부와 이모님, 이모님 딸인 릴리(Lily) 그리고 그녀의 믿음직한 남편이자 한의사(Acupuncture)인 용건, 세 살 박이 릴리 아들인 귀염둥이 Russell, 아직 신혼인 이모님 아들인 훈이네 가정,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두 딸, 8살 쥴리(Julie) 와 13살 인 수옥(Pearl), 나의 아내인 그레이스(Grace) 이렇게 전부 13명의 여행군단이 형성 되어 바하마 유람선 가족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지만 미국에 사는 많은 가족이 같이 여행을 감으로, 여행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민생활의 제 일 단락을 총정리하고, 그 후부터는 이 땅의 주인으로, 미국이 우리땅 이라는 의식을 갖고 사는, 이민사의 큰 획을 긋고 싶은 바램이 늘 나의 가슴에 잠복돼있었던 것이다. 미래의 우리 후손들이 이민 일 세대인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상상해보며, 영구한 이민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는 심정은 착잡 한 것이다.

바하마 가족 여행을 깃 점으로, 우리가 선택한 이 미국 땅에서, 더 이상 손님 의식이 아니라, 주인 의식으로 변환되는, 그래서 삶의 새로운 영역으로(Entering into new chapter and phase in life) 진입하는 것이다. 복잡하고 모든 것이 엉클어져 있어서 일정한 단락을 짓기가 애매한 구석이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그래도 가끔 생활에 선(Line)을 긋고 획(Stroke)을 그으며 의미를 부여 해보는 것은 발전적 재미(Creative and progressive fun)가 있다.

예약이며 제반 여행준비는 아내인 그레이스와 이모부께서 하시며 2003년 2월부터 준비가 서서히 시작 되었다. 바하마는 영국령이기에 13명의 여권(Passport)정리며 마이애미까지 가는 항공사 예약이며 마이애미에서 바하마까지 가는 유람선 예약을 준비가 시작되었다.

나는 여행을 믿는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다. 새로운 자연과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음미하고 관찰하며, 반복되는 일상생활에 일탈을 가함으로, 내면의 여유와 안목 그리고 삶의 지평을 넓히는 삶의 필수품이다. 환경을 바꾸어 봄으로 자신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며 자신과 삶의 변화를 크게 이룰 수 있는 한 기폭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루에 한번은 수면이 요구되듯이 일년에 한번은 어떤 형태로든 여행을 떠나야 된다. 자극이 없고, 정진하지 않는 삶은 도저히 매력이 없는 것이다. 정체 되어 있고 성장과 성숙이 없는 생활은 살아있음이 아니다.

2003년 7월27일!   바하마 유람선 가족여행 떠나는 날!
시간의 빠른 흐름 따라 먼 훗날의 일 인 것만 같던 그날이 마침내 온 것이다
예 약의 매력은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경제적인 측면도 있지만, 오랜 전부터 확정된 미래를 생각 할 때마다 즐거움이 솟구치고, 그래서 미리미리 현재에서 미래를 당겨다가 미리 덤(Premium)으로 즐기며, 바야흐로 그날이 왔을 땐, 역사의 한날에 주인공이나 된 듯 감격이 넘쳐난다. 예약 문화는 분명 선진 문화이다. 예약은 질서이자 예측이다.

우리 집이 있는 롱 아일랜드(Long Island)에서   택시를 타고 퀸즈의 라과디아(La Guardia) 국내공황에 도착하니, 이미 이모님 가정과 우리 아버님은 벌써 와 계셨다. 남들 모두 일하러 가는 분주한 월요일에 휴가를 가기 위해 공항으로 오니 기분도 이상야릇하고, 분주한 공항의 모습들이 오히려 즐겁기만 하다. 공항의 풍경이 마치 질서를 향한 무질서의 어수선함과 어지러움이 계속되는 형국이다.  라과디아 국내공황의 좁은 하차공간에 계속 밀려오는 택시며, 큰 여행가방들을 Check-In 하느라 분주한 모습들이 뉴욕의 바로 그 모습이다. 국제공항인 케네디 공항(Kennedy International Airport)과는 또 다른 아기자기한 친근감이 느껴진다

“ 일찍 나오셨어요?”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고,
“Good Morning! Happy Birth day!”
이모에게도 인사를 큰 웃음과 씩씩한 영어로 한 셈이다.
“Good Morning!  석호, 왔구나.”
이모님도 반가운 표정을 해주신다.

곧 이어서 이모 아들인 훈이 가정이 도착했고, 10여분 후에 이모님 딸인 릴리 가정이 도착하여 우리모두는 공항에서 즐거운 여행을 앞에 두고 모처럼 가까운 만남을 만끽하며 삼삼오오로 의자에 않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 마당이 벌어졌다. 즐거운 여행을 앞에 두고 마음의 여유로움과 한가함을 즐기는 것이다.

2003년 7월 27일 아침 9시에 마이애미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7시까지 뉴욕 퀸즈 라과디아 공항에 왔고, 가방들을 Check-In 하고 철저한 안전검사를 통과해서, 탑승하기 까지는, 한 시간 정도 Gate 에서 기다려야 한다. 신발까지 벗기고, 모든 짐 꾸러미를 X-Ray 검사기에 통과시켜야 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불평 없이 묵묵히 협조를 한다.  공항 안에 사람들의 표정은 진지하며 어떤 목적과 임무가 있는 사람들처럼 활기차고 방향감각이 있어 보인다.

아침8시30분부터 탑승을 시켰고, 9시5분에 비행기는 엄청난 속도를 내며 활주로를 달리다가 마침내 공황 활주로(Runway)의 끝부분 땅을 이륙(Take-off)한다.

땅 이 끝나고 공중이 시작됨을 느낄 때 바로 그 전환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운명에 들어왔음을 감지한다. 바로 그 분리 점에서 우리 모두는 지상인(Earthling)에서 우주인(Astronaut)이 되는 것이다. 비행기가 공중으로 어느 정도 올라가다가 방향을 틀어 대면서 하늘에 자리를 잡아댄다. 비행기도 자신의 하늘 길을 찾는 것이다. 하늘에 어느 정도 올라가니, 불안감 대신에 안정감이 승객들의 가슴에 오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안심하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뉴욕의 모습은 바둑판 같은 하나의 예술이다. 서울처럼 도시가 커나가면서 계획을 한 중구남방의 도시계획이 아닌,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계획을 짜서 그 계획대로 도시성장을 유도한 계획도시의 전형(Prototype)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땅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답다. 산도 보이고, 강도 보이고, 바다도 보이고, 고층건물도 보이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보이고, 가끔 골프장도 여기저기 보인다.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며, 뭉클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느껴보지 못한 감정과 느낌이다.

“ 저 안에서 생활 한다고 왔다 갔다 한 것이 마치 소꿉장난이나 한 것 같군!”
나 는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플로리다의 올랜도는 신혼여행 때도 왔고 또한 두 딸들이 좋아하는 디즈니월드(Disney World) 때문에, 여러 번 왔지만 마이애미는 이번이 처음이다. 뉴욕을 떠난 비행기는 3시간 후에 마이애미 국제공항에 도착한다. 3시간 만에 뉴욕에서 마이애미에 온다는 사실에, 나는 엄청난 문명의 혜택(Benefits of modern civilization)을 실감하고 있었다.

인간 문명의 발전사를 보면 물의 사용법, 즉 어떻게 수로시설을 설치하여 농사와 식수로 사용하느냐가 문명발전의 척도가 되던 시절도 있었다. 물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느냐가 인간생활에 바로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의 물 사용법과 물 관련 수로시설은 지금의 수준으로 본다 해도 상당한 수준을 보여준다.  산업혁명(the Industrial Revolution) 후로는 유통의 시대가 되면서 도로가 문명의 척도가 되기도 했다. 거미줄 같이 잘되 있는 미국의 도로 시설은 물물교류에 절대적 역할을 해낸다. 한국의 비약적인 발전도 경부고속도로가 큰 역할을 기여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 대에 와서는 속도전이다. 총알 같은 고속철(bullet train )의 시대이다. 빠름의 경쟁이다. 얼마나 빠른 비행기를 만들어 내느냐의 싸움이다. 빠른 전투기를 가진 나라에게 낙후된 전투기를 가진 나라는 경쟁에서 지게 되는 것이다. 빠름은 과학의 척도이고, 과학은 철학의 깊이에서 나오고, 그 나라의 철학수준과 과학수준이 그 나라 문명의 수준 인 것이다.  앞선 문명의 국가가 세계를 이끌어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옛날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 Miami에 사는 사람들과 New York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교류를 했을까?  상상의 날개를 펴보았다. 지금 뉴욕과 마이애미는 비행기로 3시간 차이로 일일 생활권이다.

마이애미 국제공항(Miami International Airport)은 제법 규모가 있고, 사람들의 표정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공항에 이미 대기하고 있던 유람선회사 전용 버스를 타고, 마이애미 시내를 가로지르며 20여분 달리니 유람선이 정박한 부두에 도착했다.  이곳은 사람들의 인적이 드물고 유람선 관련 시설과 여행객들만 오갈 뿐 일반인들은 접근할 필요가 없는 부둣가이다. 정박해있는 배 반대쪽에는 유람선 회사 본부같이 보이는 큰 건물이 눈에 뛴다. 깨끗하고 단정한 부둣가 이었다.

우리들이 승선할 유람선은  “Majesty of the Seas” 로 명명된 배이고, 처녀출항을 1992년 4월26일에 하였고, 총 무게는 73,941 톤이고, 최대속도는 19 Knots 이고, 최고 탑승인원은 2744명이나 되는 엄청난 배이다. 길이는 880 Feet이고, 대모(Godmother)이름은 Queen of Sonja of Norway 이다. 2700명 이상이 그 배 안에서, 식사하고, 샤워하고, 취침 할 수 있게끔, 음식을 만들 재료며 그것을 보관할 냉동시설이며, 식수나 세면용으로 쓰일 물이며, 사람들이 배출하는 쓰레기 처리 시설이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시설을 움직이는 전기시설이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 앞에, 난 그 거대한 스케일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다에 떠 있는 완벽한 호텔이었다. 모든 현대문명의 시설이 그 배 안에 다 들어와 있었다.

승선수속을 하는 5층짜리 건물은, 정박해 있는 유람선(12층 )과 바로 나란히 붙어서 있었고, 건물로 들어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오니 200여명 정도가 이미 서류수속을 하고 있었다. 서류수속이 끝나면 이 건물에서 바로 배의 입구 문과 연결이 된다. 사람들의 자연스런 휴가 복장이며, 미소 띤 안내원들의 친절한 태도며, 흘러나오는 흥겨운 캐리비안풍의 음악이며, 수속건물 창밖에 보이는 우람한 유람선이며, 벌써 즐거운 유람선 여행의 분위기가 각 사람의 피부에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앞으로 흥미진진한 일들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승선절차가 끝난 후 안내판 대로 따라 들어가니, 배의 입구 바로 전에서 마지막 안전검사(Security Check)를 한다.  2001 년 9.11이후의 달라진 미국의 모습이다. 미국의 본토가 공격을 당함으로 지금까지의 미국안보와 미국인의 생활 패러다임(Paradigm)이 바뀌어진 것이다. 미국도 엄청 놀랐다. 뉴욕에 사는 나는 그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알카에다의 지도자 빈 라덴(Bin Laden)이 모든 미국인에게 훈련을 지독하게 시키고 있다는 상념이 스쳐갔다.  무고한 시민이 희생되는 테러(Terrorism)라는 야만적인 방법론은 절대 용납이 안되지만, 왜 빈 라덴이 저렇도록 집요하게 테러를 통해서라도 말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이고, 그의 원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한번쯤은 생각하게 되었다. 왜 저들은 엄청난 보복을 감수하고서도 저 짓을 해야만 하는가? 우리가 테러를 증오하는 만큼 저들의 항변에도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치의 양보가 쉽지 않은 역사적 담론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민족주의자 김구 선생님도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테러리스트(Terrorist)로 간주되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Terrorism is poor man’s war while war is rich man’s terrorism.).

배 문 입구 바로 전에 기념사진을 찍는 곳이 있어서 온 가족이 사진을 찍었다. 꼭 구입해야 되는 의무는 없었다. 나중에 사진을 보고서 원하면 구입을 하는 것이다.  잘나온 기념사진을 누가 안 살까?  소비자에게 구매의욕을 유발시키며 충동시켜서 물건을 파는 치열한 상업주의(Fierce Commercialism)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람선3층에 배정된 방에 들어와서 짐을 푸니 오후3시가 되었다. 점심식사를 위해 11층의 식당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지상건물로 치면은 12층이 되는 유람선의 내부에 엘리베이터(Elevator)가 여러 대 원활하게 쉼 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11층에 올라오니 탁 트인 건물 옥상 같은 공간이 나오고, 시야에 확 트인 바다가 보이며, 바다의 넓음을 즐기기에 충분했다. 바다는 모두를 품는 듯 하였고, 태곳적부터 조용히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는 어떤 말을 하고 있는데 이제는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알아 채야 된다는 느낌의 자연언어를 듣는 듯 하였다.  식당옆의 실내 수영장은 이미 일찍 승선을 해서 점심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음악에 맞추어 흥겨운 춤도 추고,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고, 휴가분위기는 이미 맘껏 띄워져 있었다. 앞으로 즐거운 일만 남았다 라는 식의, 사람들의 흐뭇한 표정들 이었다. 문명의 무장이 해제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 이었다. 식당에도 사람들이 많이 있고, 푸짐한 음식을 마음대로 갖다 먹으며 여유롭고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우리가족 4 식구도 자리를 차지하고 약간 늦은 점심식사를 시작하였다. 15분 정도가 흘렸을까, 실내 방송에서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것이 아닌가?  기내방송이 여러 번 되풀이 되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승선했던 유람선 문 앞의 사무실로 오라는 방송을 들으니 약간은 의아했지만, 대수롭게 생각 안하고, 이미 가져온 식사를 마친 후 가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5분 후에 또 다시 같은 내용으로 방송이 나왔다.

난 뭔가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약간 불길한 느낌이었다.

“ Grace, 지금 갔다 오지 그래”
뭔 지는 모르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일 것이고, 아내가 가서 순식간에 일을 처리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는 말이었다. 두 딸과 함께 후식을 즐기며 10분 정도 기다리니 집사람이 씨큐리티 유니폼(Security Uniform)을 입은 작은 체구의 흑인 하고 나타났다.    두 사람이 같이 오는 것을 보는 순간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나 영주권이 갱신이 안되어서 같이 갈 수 없고, 배에서 내려야 된데”
아내가 하는 말이었다. 전연 예상을 못한 말이 아내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 귀를 의심했다. 금방 들은 말이 몸으로 연결이 잘 안되었다.
이 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아니 배에서 내려야 된다니, 오랜 기간 준비하고 겨우 탄 배인데 내려야 된다니. 다 된밥에 재 뿌린다는 말이 이런 경우란 말인가. 4년간 열심히 준비하면서, 고대하던 올림픽의 본 게임(Main Game of Olympic)도 참석 못해보고, 예기치 않은 사고 때문에 경기장 밖으로 퇴장 당해야 하는 선수의 심정 같았다. .

“ 무슨 얘기 하는 거야? (What are you talking about?) ”
의 아해 하고, 어정쩡한 태도로 되물으니, 아내는 자신의 영주권을 보여주며 2년 전에 시효가 지났다는 것이다. 동행한 식구들이 있다며 같이 가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해보았지만 절대 안 된다는 것이 이민국 담당직원의 말이라는 것이다. 9.11 사태 이후 미국의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그때 온몸에서 피가 역류(Backward flowing of blood)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길을 찾아볼 의향으로, 그리고 잘 설명하고, 설득한 생각으로 담당 매니저(Manage in charge)를 볼 것을 요구하며 딸들은 11층 식당에 남겨두고, 아내와 씨큐리티 맨과 같이 4층의 사무실로 내려갔다.

“Hi! I am David Shin. I am accompanying Grace as husband. By the way, I am US Citizen. Although my wife didn’t renew her green card, given the totality of situation, I am cordially requesting to let my wife travel with us to Bahamas, Please! “
40대 후반의 남미 계의 마음씨 좋게 생긴 여자 담당자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내가 시민권자인 남편이며 같이 여행하는 어린아이들도 있고, 모셔야 할 부모님도 계시고 하니 선처를 부탁한다고 호소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민국의 정책이 그러하니 자기들도 따라야 된다며 단호한 입장을 보이는 것이었다. 배에서 내려야 된다는 것이었다. 다른 방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들도 이민국에 전화를 걸어 허락을 요청했지만 거절 당했다는 것이다. 만약 마이애미를 떠나 영국령인 바하마로 갔다가 미국에 재입국시 영주권의 시효가 지났으므로 추방을 당할 수도 있다고 차근히 현행이민 규정을 설명해 주었다.

“ 추방”
“추방”
“Deportation “
그 한마디에 내 몸의 기운을 모두 빼앗아 갔고, 내가 깨끗이 포기하도록 하는 엄청난 마력을 발휘했다. “추방” 이라는 말 한마디에 우리는 완전 무장해제가 되었다. “추방” 앞에 어떤 이론이나 논리나 설명의 노력이 전연 힘을 쓰지 못했다. “추방” 이라는 극약처방 앞에는 명령자에 대한 순종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이모님의 환갑 기념 여행인데 우리 네 식구가 다 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추방은 법이고 법은 무서운 것이다. 법은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법은 나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공익을 위해서는 나를 제재하기도 한다.

“그레이스, 뉴욕 행 비행기를 알아봐서, 되 돌아가……”
나 는 나지막하게 패전한 장수가 독백하듯이 아내를 보면서 말했다.  아내도 돌아가야 한다는 기막힌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내는 기다리고 있는 딸들에게는 이야기는 해주고 내려도 내려야 된다며 나와 같이 유람선11층의 식당으로 올라왔다. 씨큐리티 맨(Security Man)은 계속 따라왔다. 그레이스가 이 큰 유람선에서 잠적이래도 할양이면, 유람선의 출항시간이 지연 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레이스가 두 딸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은 내려야 한다고 하니 두 딸들은 영주권 갱신 상황은 이해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엄마랑 헤어져야 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슬픔이 왈칵 몰려와 눈물을 흘렸다.  13살 수옥(Pearl)이는 자신도 엄마랑 같이 배에서 내리겠다고 울먹인다. 옆에서 이 모든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나는 참으로 기가 찼다.

또한 결정적인 순간에는 딸들이 엄마 쪽으로 기운다는 사실도 나는 그때 알게 되었다.

“Pearl and Julie!  Let us make the best out of this difficult situation. Why don’t we give it a try? “
사 촌동생 릴리가 애들을 격려(Cheer-Up)하려 노력했지만, 이미 전체 분위기는 완전히 침울하게 바뀌어 있었다.  잔칫집에 초상난 것 같은 이상한 분위기가 되었다. 나는 앞일을 생각하니 아찔했고, 이젠 낭만이니, 여행이니, 여유는 나대신 휴가 떠났고, 현실적이며 생존적인 차원에서만 이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누구를?  이민국 직원을?  유람선 직원을?   아내를?   빈 라덴을 ?   단지 냉혹한 현실만이 있을 뿐 이었다. 상황은 최악인데 그 상황에 대한 원인과 책임자가 금방 나타나지 않게끔 모든 상황이 얽히고 섥혀서 지금의 고통의 환경이 온 것이다.

“ 애들은 내가 챙길 테니, 그냥 뉴욕으로 돌아가지….으으음”
마 음을 다시 추스르며 아내에게 말했다. 11층 식당에서 남은 식구들은 아내와 헤어져야만 했다.  같이 유람선 여행이 아닌 서로의 이별을 해야 했다. 아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금방 사라졌다. 아내는 간단한 서류만 챙겨서 핸드백만을 든 채 배에서 바로 하선 해야 했다. 배에 탄지 1시간만의 일 이었다.

우리가 엄청난 일을 치르는 그때에도 하늘은 푸르고, 바다는 넓고, 다른 사람들은 캐리비안 유람선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삶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었다. 나의 계획과 기대는 냉정한 현실 앞에서 그대로 무릎을 꿀은 것이다. 이것은 내 밖의 세계 이었다.  세상이 나를 버리는 듯 하였다. 내가 세상을 잘못 본 듯싶었다.

유람선은 마이애미에 나의 아내만 쓸쓸히 부두에 남기고, 서서히 바하마를 향해서 긴 바다 여행의 시작을 힘있게 물살을 뒤로 밀어내며 점점 육지와 멀어지며, 아무도 없는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사촌동생 릴리가 나의 딸인, 쥴리와 수옥이 에게 수영하자며 11층 식당 옆에 있는 갑판 수영장으로 데리고 갔다. 배의 제일 꼭대기 갑판 위에 있어서 하늘이 보이고 바다가 보이는 배 안에 있는 수영장, 주위에는 일광욕을 즐길 수 있도록 누울 수 있는 의자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딸들은 선상 수영장의 물에 들어가더니 금방 활기를 찾고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엄마가 없는 것을 금방 잊은 듯이 즐겁게 놀았다. 누구 말대로 인간이 엄마 뱃속이라는 바다 안에 있었다고 하더니 저렇게 물을 좋아할까?

나는 의자에 힘없이 누웠다.  마치 소금으로 절여진 배추처럼 힘이 빠져나갔다.  참으로 암담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골머리가 우지끈 아프고,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니 걱정을 넘어 모든 것들이 고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즐거운 여행이 아니라 감옥이었다. 모든 것 포기하고 내릴 수도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 고통을 피할, 다른 묘안이나 선택의 방도가 없었다. 당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처절했다. 일은 꼬였는데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는 상황 된 것이다.

“ 살다보니 이런 경우도 있구나!  젠장!  세상에….”   “ 어찌하다 이 지경이 됐단 말인가? ”
나 는 혼자 뇌까리며 속으로 포효했다(Roaring inwardly). 릴리 신랑 용건이 위로 차원에서 맥주(Beer)를 사서 나에게 안겨준다. 한의사답게 상황판단이 빠르다. 속 탈때는 시원한 맥주가 역시 최고다. 이래서 답답할때 사람들이 술에 빠지게 되는구나 !  나는 알게 되었다( The truth was revealed to me).

7시30분부터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지상에 있는 2700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호텔이 바다에 떠있는 것이 유람선이기 때문에 음식도 훌륭하고 서비스도 만점이다.
아 버지, 새어머니, 나와 두 딸이 한 테이블을 차지했고, 건너편에는 이모님 식구들이 크게 한 테이블을 차지했다. 이모님의 60회 생일을 유람선 안에서 결혼한 두 아들, 딸 부부와 같이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니, 이모님 테이블은 화기애애 하지만, 우리 가족 테이블은 분위기가 무겁기만 하다.

이 쪽은 초상집(Funeral home), 그리고 저쪽은 잔칫집(Banquet house)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두 딸은 식탁에 앉으니, 그제서 다시 엄마 생각이 나는지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있다. 아버지는 한국의 유교전통 때문인지 45년을 같이 살았지만 아직도 어색하고 어렵고, 새 어머니는 아직도 익숙지 않고, 아내도 없고 하니 분위기는 썰렁하기만 했다. 우리 어머니가 8 년 전 불의의 사고로 돌아 가셨을 때 내가 어머니를 사모하며 흘렸던 눈물과 고통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엄마가 없다고 눈물을 내보내는 딸들의 고통과 눈물을 보는 아빠인 나의 심정은 전연 새롭고 유별난 느낌의 고통 이었다. 대충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들어와 취침을 했다. 모든 것을 잊고만 싶었다.  모든 상황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7월 28일 화요일. 일찍 일어나는 습관도 있지만, 긴장 탓인지 새벽4시30분에 잠에서 깨어났다. 뭔가 답답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3층에 있는 우리 방을 나와 12층의 갑판에 올라갔다.  갑판에는 아무도 없었다. 넓고 시퍼런 바다를 보니 조금 가슴이 뜨이는 듯했지만, 그 무언가 불편한 것이 가슴에 무겁게 웅크리고 있었다. 내가 불편하니 세상이 전부 불편하게 보였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가슴에 있는 것들을 글로 풀어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펜을 잡고 가슴에 있는 것들을 떠오르는 대로 써 내려갔다. 옆을 보니 딸들은 곤히 잠에 떨어져 있었다.

펜을 잡으니 가슴속에 있던 뭔가가 무더기로 쏟아져(Gushed out) 나왔고 다듬을 필요 없이 그대로 받아 쓰기만 하면 되었다.

(“ 현실인가, 가상인가가 혼동되는 삶의 순간들이 이따금씩 있소. 섬직한 순간들이고 삶이 이렇게도 튈 수 있다는 타의성(Accidentality)을 경험하는 순간들이요. 그레이스가 배에서 찍힘을 받는 순간 그것은 원망이 아니라 운명이었소. 삶의 기본전제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들이었소. 4명이 치러야 될 삶의 Game을 3명이 치르도록 운명이 설명을 이겼고, 원망을 하기엔 너무나 사치스런, 이미 시작된 Game을 치러야 되는 큰 배 안에, 삶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오.

난 지금 삶의 환경과 조건들이 감옥 같음을 느꼈소. 두 어깨에 무거움을 느꼈고, 챙겨야 될 어린 딸이며, 모셔야 될 부모님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소하게는 저 가방에 챙겨진 두 딸들의 옷가지들을 정리하는 것조차도 쉬운듯하지만 어려운 책무로 나를 짓누르는군요. 부인을 잃은 남편들의 심정과 형편이 약간은 느껴지는 계기가 되는군요. 상처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심정적으로 동정은 했지만 이렇게 몸으로 절절히 체득은 못해 보았소.

그나마 감사한 일은 이런 삶의 고통이 올 때 밖으로 돌리지 않고, 안으로 돌리는 지혜가 약간 생긴 것은 삶의 큰 축복으로 여겨지오. 내속에 잠복해 있던 또 다른 나(Inner self)를 발견하고, 삶의 절실한 현장과 현실에서 그 나를 활용하고 있는 중이오.

쥴리와 수옥이는 바이러스 먹은 컴퓨터처럼 사기 떨어진 군인처럼, 풀이 죽어있소. 그들의 생활에 엄마가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었는지, 저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말해주고 있소. 난 늘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외곽을 돌면서 자라나는 딸들을 즐기기만 했지, 그들의 모습과 품세를 이만큼이나 유지하고 키우는데 소진된 당신의 애씀과 노력에 감사와 격려가 너무 적었던 가져 미안하오. 이제야 뭐가 조금 보이는 듯 하오(Now, as for me, a bit of something in life starts to be seen).

이른 아침 5시30분 경에 12 층 갑판에 올라가니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상큼한 바닷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유람선은 조금의 요동도 없이, 안 움직이는 듯, 그러나 유람선 밑의 바닷물을 보니, 바닷물을 힘차게 가르며 빠른 속도로 부드럽게 잘나가고 있소. 바다가 넓고 조용하며 사방은 어둠에 싸여있소. 이 환상적인 분위기와 순간에 정작 당신이 없으니 참으로 적적하오(Without my wife, Grace, I feel very much lonely and solitary).

당신이 없으니 난 펑크 난 자동차처럼 상당히 불편하고 고통스럽소. 연애시절을 회상하며, 컴컴한 사방과 잘생긴 유람선 그리고 덤덤한 바다만 알도록 핑크 빛 키스도 하고 싶었는데, 나의 정당한 이 정신적, 육체적 꼴림을 풀고 교감하고 교류할 대상이 없소. 그것은 고통스런 환경이오. 여성에게 줌으로 인정 받고 싶은 남성에 들어있는 사내기질을 잠재우고, 챙겨야 될 두 딸들과 모셔야 될 70 넘으신 부모님 사이에서 샌드위치(Sandwich)가 되었고,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여행하도록 신경을 써야 되는 상황이 된 것이오.

난 여행자(Tourist)가 아닌, 예기치 않은  수행자(Disciplinant)가 되어야 되는군요. 예기치 않는 궤도 수정은 당혹감과 고통을 주고 있소. 수행자의 자세가 아니라면 이런 급격한 상황전환을 수용하기가 간단치만은 않으오. 나는 수행자의 자세로 전환해야 되나 보오. 그것은 운명이고 원망할 순 없소.  원망이 현실을 일 인치(My complaining wouldn’t change or improve my reality that I are put in, not even one inch of it. Period.) 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요. 수행자의 노고와 기쁨을 평가절하 함도 아니오.

당신이 같이 있어서 우리의 결혼15년을 회고하며 따끈한 연애도 하고 싶었고, 자식들에게 부모 노릇도 같이하고 싶었고, 60회 생신을 맞이하신 이모님 가정에 기쁨을 드리기 위해 광대 노릇도 같이하고 싶었고, 부모님도 같이 모시고 싶었고, 사촌동생 훈이와 릴리 가정에게도 사춘형 노릇도 멋지게 같이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집안의 큰 축제로 기획된 가정사의 한 Page 이었소. 그런데 당신 하나 빠짐으로 이렇게 대 이벤트(Big event )의 핀트가 빗 나갈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소?

경황없이 당신과 헤어지는 순간에 난4명 아닌 3 명으로 치러야 되는 가족여행 의 중압감과 향후 계획에 쏠려서 당신의 씁쓸한 마음을 보다듬을 따듯한 말 한마디 못했구려. 경황없고 절박하던 그 순간과 상황 이었기 때문이오.  인생은 말 다하고 사는 것이 아님을 느꼈고, 같이 살아온 지난 15년의 전후 문맥(From its context)으로 나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기만 바랬소.

당신이 나의 삶에 이렇게도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오. 두 몸이 한 몸이 된다는 성서의 표현대로 나의 삶만도 당신의 삶만도 아닌 우리의 삶이 확실하오.  우리의 삶은 또한 부모 세대의 삶과 자녀세대의 삶에 연결되어서 한 축을 이루니 우리의 삶은 또한 전체의 삶에 다름 아니오. 당신 없는 나의 삶은 앙꼬 없는 찐빵( a cake without bean-jam stuffing)이요. 고무줄 없는 빤쓰요. 젓가락(Chopstick)없는 자장면이요. 웃으면서 농담으로나 쓰던 이 말들이 이렇게 폐부에 와 닿을 수가 없구려. 나는 이 표현들을 절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오.” )

두 딸들은 아직도 자고 있었고, 가슴에서 끓고 있는 감정들을 견딜 수가 없어서 적어보니 일사천리(Rapid advance)로 글이 쭉 나왔고 3장을 채우고 나니 그나마 다소 시원하였다. 가슴속을 태우고 있던 시커먼 앙금(Heavy emotional deposits)들이 빠져 나가는 듯 했다. 쓴 글 종이 3장을 가방에다 챙겨 넣었다. 바로 이 시간 나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 했으니 후에 좋은 추억의 글이 될 것 같은 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마 이애미에서 월요일 오후5시경에, 아내만 부두에 남기고, 떠난 유람선은 밤새 항해해서 바하마에 화요일 아침에 도착했다. 저녁식사 후 사람들이 잘 때도 유람선은 밤새 항해를 해서 사람들이 아침에 눈을 뜨니 새로운 세상, 바하마(Bahamas) 에 이미 정박해 있는 것이다.

오늘은 화요일.
바하마의 첫날을 아틀란티스 호텔(Atlantis Hotel)을 구경하고 해변가에서 수영을 하기로 되어있다. 본격적으로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내의 역할이라는 것이 다층적 구조이었다. 사랑과 애정을 나눌 수 있는 형이상학적(Metaphysical) 상대 이기도 하지만 생활의 기본적인 면을 해결해주는 형이하학적 생활 동업자의 영역도 있는 것이다.  밥, 청소 그리고 빨래 하는 것 그리고 자녀들의 기본적인 것을 챙겨주는 아내가 빠지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없는 아내 생각만 하염없이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생활은 그 자체로서의 방향과 속도와 진도가 있는 것이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갈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의 최선 찾기가 인생 인 것이다.

인생은 계속 되야 되고 이빨(Teeth)이 없으면 잇몸(Gum)이 있는 것이다. 아틀란티스 호텔은 200여종을 대표하는 150,000마리의 고기가 있는 수족관으로 유명한 초 호화판 관광호텔이다. 고급쇼핑도 할 수 있고 호텔의 시설에서만 즐겨도 충분한 휴가가 되게 모든 시설이 완벽하다. 최고급 방은 하루에 25,000 불이나 하고 최소한 1주일을 예약을 해야 된다. Pop star singer 인 Michael Jackson 같은 연예인들이 주요 고객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관광 가이드의 안내로 호텔과 수족관을 구경하였다. 엄청난 투자를 해서 만든 국제 일류호텔임에 틀림이 없다. 엄청나게 투자해서 엄청나게 돈을 벌어대는 자본주의 냄새가 물씬 난다. 호텔구경 자체가 관광코스 이었다. 1시간15분 정도 가이드의 호텔 관광 기본안내 코스가 끝이나니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 호텔 안 로비에서 약 30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점심식사를 하였다.  점심식사 후, 유람선 에서 가까운 해수욕장에 가서 해수욕을 즐긴 후 다시 배에 돌아오니 오후 4시30분 정도가 되었다.

배안 3층에 있는 우리 방안에 들어오니 누군가가 들어온 것 같은 흔적이 있었다. 분명히 우리가방도 입구에 두고 나갔는데, 지금은 방 중앙에 있고 책상 위에는 이상한 전화카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누군가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들어 왔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아마 방 청소부였을 것으로 생각했다.  두 딸에게 방안에서 샤워를 하라 하고, 나도 목이 마르고, 딸들에게 줄 물을 가지러, 11층의 식당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내려서 식당으로 들어가는 자동문을 들어 가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레이스가 식당 안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아니! 그레이스 ! 이거! 그레이스!  어떻게 된 거야!”
나 는 너무 의아했고, 너무도 반가워 우리는 서로 팔을 벌려 포옹을 했다. 그것은 엄청난 의아감이고, 해방감이고, 반가움이었다. 헤어진 바로 그 장소에서 정확하게24 시간 만에 다시 만나다니 그야말로 무엇에 홀린 듯 하였다. 무슨 연출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것은 정확히 24시간 지난 후 헤어진 바로 그 장소이었다. 눈물과 한숨으로 나의 아내이자 두 딸들의 엄마인 그레이스(Grace)를 보냈던 바로 그 장소, 엉겁결에 본의 아니게 서로 헤어졌던 바로 그 장소, 11층 식당 에서 지금은 감격과 의아함으로 다시 만나다니……..!!!  전연 기대치 않은 재회를 하다니 !!

“Oh, my God!  Grace! 어떻게 된 거야? (Grace! What has happened to you?)”
육 지인 마이애미에서 어제 서로 헤어졌는데, 이 먼 섬나라 바하마에 와있는 유람선의 갑판에 다시 나타나다니.  아내도 기쁜 모습이 역력한데 엄청난 일을 격은 사람처럼 쉽게 말을 풀어내지 못하고 우여곡절 속에 비행기를 타고 바하마로 왔노라고 만 말을 한다. 뭔가는 많이 있는데 표현이 금방 안 되는 표정이었다.  3층에 있는 방으로 내려와서 딸들에게 엄마가 왔다고 알리니 딸들이 놀라고 감동의 바다(sea of emotion)가 된다.

오 마이 갇(Oh, My God)!
팬태스틱(Fantastic)!
와우(Wow)!
어메이징(Amazing)!
원더풀(Wonderful)!  It is awesome!  Incredible!

“ 아버님이세요, 제가 다시 배로 돌아왔어요.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해요!”
아 내가 실내전화로 각방에 있는 식구들에게 돌아온 소식을 전하니 다들 환호성이다. 침울하던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이 되었고,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었다. 한 식구의 존재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들 이었다. 한 식구는 단지 한식구가 아니라 전체의 일부이었던 것이었다. 그 한 식구가 빠졌을 때, 전체가 영향을 직접 벋었던 것이다.

“ 어떻게 된 건지 자초지종을 자세히 얘기해봐(Give me the whole story, Please!)”.
나는 재촉하며 물었다. 난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나간 과거의 과정이 궁금했다. 우리가정을 기쁨과 고통으로 몰고 왔던 그 과정을 이해해야 했다.

아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해주었다..

(“ 월요일인 어제 오후 3시45분경 모든 서류를 당신에게 내주고 핸드백 하나만 들고 배에서 내려, 승선 수속했던 건물에서 이민국 담당 직원을 다시 만났어요. 단 한가지 방법은 지금은 이민국 문을 닫았으므로 다음날 마이애미 이민국으로 가서 영주권을 갱신해서 바하마로 올 수는 있으나 이민국 에서 바로 해줄지는 모르겠다고 말해 주었어요. 실오라기 같은 가능성이라 느셨어요. 그러나 그 말은 나에게 가능성의 씨앗(Seed of possibility)을 심어 주었어요.

나는 사람들이 다 떠난 부두에 홀로 서 있었어요. 그때가 오후4시15분경 가족들이 탄 배가 떠나려면 아직도 한 시간 가량이 남았는데, 왠지 배가 떠나는 것을 보기 전에는 내가 부둣가를 떠날 수가 없었어요.   11층 식당에서 배 밑을 내려다보면 바로 내가 보일 텐데, 행여 나를 보면 가족들이 더 불편해 할 것 같아서 다시 안 보이는 곳을 찾아 앉았지요.

5시15분경 드디어 승선수속 건물위로 윗부분만 보이던 거대한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밀려가듯 떠나는 배를 보니 나는 육지에 서있었으나 깊은 바다위로 떠나가는 배 안의 가족들이 마음에 다가왔어요.

“늘 무엇에 쫓기듯 떠밀리듯 부딪치며 아쉬웁게 살아 왔는데……”
“애틋한 애정을 표현할 시간이 늘 부족했다고 느껴왔는데……”
“아직은 아쉬움 없이 인생을 다 정리 할 수가 없는데……”
“만약 이 유람선이 이렇게 떠나는 것으로 우리의 영원한   헤어짐이 된다면……”
“다시는 정녕 배가 돌아오지 않아 영영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여기까지 같이 한 것이 아쉽지만, 이것으로 이 생 에서의 전부 다였다 라면……”
“더 살아야 되는 진행형 같지만 아쉽게도 마침표를 여기서 이렇게 찍어야 하는 거라면……”
“인생의 끝자리 라는것이 원래 이런식으로 아쉬움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원래 산다는 것이 마음은 원하지만 현실이 안 따라 주는 것 이라면……”
“인생이 자의만이 아니라, 타의로도 진행 되는 거라면……”

배의 꼭대기가 육지에서 안보일 무렵까지, 배가 육지에서 가물가물 안보일 정도로 멀어 졌을 때, 어처구니 없이 내가 그러한 생각들에 사로잡혀 버리더군요.

순간 내 마음이 길바닥에 왈칵 쏟아져 내리며 서있을 힘조차 잠시 잃은 듯 했어요.

딸 둘 그리고 나의 남편, 저 세 사람 없이 나 혼자 이세상에 남는다면, 그렇게 산다는 것은, 내게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깊이 느꼈죠. 그런 순간을 느끼기가 괴로워 죽고만 싶을 것 같았어요. 배가 저 세 사람을 태우고, 바다로 멀리 멀리, 더 멀리, 자꾸만 멀어져 가니, 내 몸에서 세 사람이 빠져 나가는 듯 했고, 저 세 사람이 내 몸에서 빠져 나가니, 난 내 몸을 지탱할 힘을 잃어 버렸어요. 완전 절망 이었어요. 산다는 것은 바로 희망의 힘임을 느끼는 순간이었어요.

사람은 빵만의 힘만이 아닌, 희망과 소망의 힘으로 사는 것이었어요.

자 살(Suicide)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늘” 왜 생각을 잘못해서 귀한 생명을 버릴까?”  라고 생각했었으나, 생각(Thought)이나 관념(Idea)이 아닌 서로가 연결되어 끌고 당겨주는 끈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것 이었어요.  그 끈이 끊어지면 존재할 힘이 없어지기에 살수 없는 거구나 실감하며 다시 한번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고 느꼈지요. 반드시 사랑해야 할 대상(Object)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어요. 당신하고 싸웠을 때의 절망감, 너무 힘들어 애들을 공연히 야단치고 때리기까지 했던 적도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것들 밑에 터를 잡고 있는 마음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것은 이미 사랑과 연결성의 확고한 전제(Premise)가 있었던 것이었어요.

가족들 없이 그 어떤 것에도 가치를 느낄 수 없다는 삶의 복판을 경험하고 만 것이지요.  나는 가족에서 왔고 그리고 또한 내가 가족을 이루었으니 그러므로 나 는 곧 가족이고 가족이 바로 나 이었어요. 가족!  가족!  같이 있을 때는 부딪치기도 했지만, 가족이 없는 환경으로 몰리니 그건 완전 절망 이었어요. 가족 없는 나는 절망 이었어요.

배가 시야에서 완전히 떠난 오후 5시 20분이 되었어요.  택시를 타려면 부두에서 길가로 얼마간 나가야 했어요. 우연히 손님을Pick-up 하러 온 택시가 손님을 못 찾아 내가 대신 탈수 있었고, 이민국으로 가는 길 선상에 위치한 호텔 중에서 가장 싼 곳으로 가자고 했지요. 택시운전사가 Miami를 잘 설명해 주었고, 불법체류자(Illegal alien)가 너무 많아 이민국은 항상 바쁘며 하루에 영주권 연장은 불가능 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어요.  Gas Station이며 Hotel 이며 전부 스페니쉬 일색 이었어요. 마치 차이나 타운(Chinatown) 격이지요.  Yellow Page안의 변호사 난을 보니 택시운전수 말대로 모두다 스페니쉬(Spanish) 광고 일색이었어요. 이민국과 이민국업무를 하는 변호사 사무실의 전화 번호를 모두 적어 놓았어요.  어렵고 절박한 상황에서 그래도 생각나는 사람은 시카고의 엄마(Mom in Chicago) 이었고, 엄마와 통화를 하고 잠들었어요.

긴장감이 있어 제대로 잠도 못 잤고 깨어보니 29일 화요일 새벽6시였어요.  세수만 대충하고,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타고 이민국으로 갔을 때가, 아침 6시20분 경 이었고, 긴 줄이 서져 있었는데, 2-3시간 정도 기다리는 줄이고, 또한 기다린 결과 그 줄로는 단지 이민국 예약을 하기 위한 줄 이었어요.

Oh my God!
줄 잡기 위한 줄이라니!!   금방 담당자를 만나도 시원치 않은 상황 인데..!!

한 이민국 직원을 붙잡고 영주권이 기간만료가 되어서 유람선에서 내렸고 딸들이 2명이나 있는 다급한 상황이니, 오늘 비행기로 바하마로 떠날 수 있게 도와달라 했지만, 위기상황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가 있느냐는 것이었어요. 있다 해도 하루 만에는 영주권 갱신이 불가능 하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 이었어요. 그 말을 들으니 절망이 온 몸으로 퍼졌고, 유람선 안의 작은방에 있는 식구들을 다시 만나는 기대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실오라기 같던 가능성이 그대로 묵살 돼버리는 것 이었어요.

처음에 이국적으로 보이던 Miami거리가 보기도 싫었고, 야자수 나무가 많이 있었으나 푸근한 느낌도 깨끗한 느낌도 들지 않았어요. 이제 아침 6시45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돌아가기 위한 비행기 표를 사기 위해 여행사가 문을 여는 9시까지 기다릴 곳이 필요했어요.  두 블록 걸어가니 McDonald가 있어서 들어갔어요. 입맛이 없어서 커피만 한잔시켜 놓고 않으니 나 자신이 너무나 처량했어요. 이모님 가정은 모처럼 계획한 환갑여행에 얼마나 찝찔할 것이며, 아버님도 내가 챙겨 들여야 되고, 딸들도 내가 챙겨야 할 텐데 얼마나 불편한 여행들을 하고 계실까?  생각을 하니 암울했어요.

그때 마침 당신이 배에서 셀룰라 혼으로 전화를 했을 때, 상황을 설명하고 각고로 노력을 했으나 길이 없어서 뉴욕으로 돌아가니 잘 놀다 오라고 했지요.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것을 생각도 해보았으나 크게 기대는 할 수가 없었어요. 이미 이민국 상황을 맛보았기 때문이지요. 기다리기가 지루해 McDonald를 나와 거리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어요.

아침 8시30분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이민 변호사 사무실(Immigration attorney office)” 이란 간판이 크게 걸려있는데 문이 열려있어서 들어갔어요. 비서에게 영주권 연장이 하루 만에 가능하냐고 물어보았더니, 대답은 천만 뜻밖에도 가능하다는 것 이었어요. 15분 정도 기다려서 변호사를 만나서 재차 물어보니 그도 가능하다 하고 비용은 70불이래요. 왠지 그 상황에서 뉴욕으로 그냥 돌아가기 보다는, 가족들에게 실망감을 줄 수 없고, 최선을 다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과, 가족들과 좀 늦게 합류를 하드래도, 마이애미에서 가능성을 찾아보자고 마음먹었는데
아-아!!  정말 희망적인 한마디를 들은 것 이지요. 다시 실 오르라기 같던 가능성이 살아나는 순간이었어요.

급 히 서류를 작성하고 사진을 찍고 담당 이민국 주소를 받고, Money Order를 끊어가지고, 변호사의 안내대로 근처의 이민국 영주권 갱신부서로 걸어가서 40분만에 영주권 연장을 기적적으로 해냈어요.  영주권 갱신 부서가 따로 있었던 거예요. 정확한 정보와 변호사의 전문성이 엄청난 결과를 만든 것이지요. 그때가 11시 30분 이제 비행기 티켓을 구입해서 바하마로 가서 다시 배 안의 가족들과 재회 하는 일만 남았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뉴욕의 담당여행사에 전화해서 티켓을 끊어 달라고 부탁을 하니 바하마는 E-Ticket이 안되니 그곳 여행사를 찾아가라 했어요. 이번에는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의 아무 여행사나 서달라고 부탁을 하니 유달리 친절한 택시운전수는 은행 건물 안에 있는 여행사로 안내를 해 주었어요.

그 여행사에서 현재 유람선의 스케줄과 티켓 모든 것을 확인하고 바하마 가는 편도 티켓을 구입했고, 처음에는 제일 빠른 것이 오후6시30분 비행기가 있다고 했으나, 3시20분 비행기 좌석이 갑자기 나와서 그 티켓을 구입했을 때가 오전11시 55분 여행사를 나와 공항에 도착하니 12시 30분 막상 도착해서 Check-In을 하려 하니 담당공황 직원이 하는 말이 바하마 거주민이 아니면 편도(One way) 티켓만으론 영국령인 바하마에 갈수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산 넘어 산이더군요.

또 하나의 장벽이 나타난 것이지요. 유람선 탈 때 필요한 서류 3가지를 챙겨 놓았기에, 그 서류를 보여주며 상황설명을 했지요. 그것을 검토하더니 마침내 수속을 해주었어요. 12시30분 비행기의 좌석이 있는데 타겠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때가 이미 12시35분 인데 시간적으로 가능하냐고 물어보니 Try 해보라고 했어요.

그 말을 믿고 공항복도 맨 끝의 비행기 타는 Gate까지……뛰고, 뛰며, 뛰어, 뛰어서 그리고 또 뛰어, 죽으라고 또 마지막으로 달려서……문닫기 바로 직전에 겨우 탑승 할 수 있었어요.

휴-우!

모 든 실망(Despair)들을 희망(Hope)으로 역전시키고 비행기 안으로 들어오니 약간 여유가 생겼지요.  이젠 희망의 큰 테두리 안에 들어 왔다는 안도감이 몰려왔어요. 1시 간 동안 몹시 흔들리는 비행기를 타고 오후 1시30분에 바하마 공항에 도착했어요.  영국령인 바하마도 소정의 입국수속이 있었어요.  공항을 나와 택시를 타고 배가 정박해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어요. 25분이나 달렸지만 왼쪽으로 바다만 보이지 염원하는 유람선은 보이지 않았어요.

유람선을 보기 전 까지는 아직 안심 할 수가 없었어요. 바하마라는 낯 설은 땅에서 이국적인 정취(Foreign sentiment)를 한가히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낯 선 땅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특공대의 심정이랄까요. 비가 오기 시작했고 5분 정도 택시가 더 가니 저 멀리서 마침내 유람선 꼭대기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 바로 저 배!”  “ 바로 저 배! “
“ 나를 마이애미에서 강제로 내려 논 바로 그 유람선”
“That is the one!”

나 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죠.  내가 마이애미에서 절망 속에서 바라보아만 했던 저 배 꼭대기를 이곳에서 다시 희망 속에 바라볼 수 있었어요. 마이애미 에서 살아져 가던 절망(Despair)의 배 꼭대기가, 바하마에서 점점 더 크게 보이며 희망(Hope)의 배 꼭대기로 나에게 다가 오는 것이었어요.

“ 아-아!…. 바로 저 배!”

이제 따라 잡았구나.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추워 떨며 배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우리 딸들이 옷가지나 제대로 챙기고 나갔을까 걱정을 하며 배의 입구에 도착했지요.  나는 배를 들어가고 나가는 Pass card가 없었기에 30분 정도 기다려 다시금 까다로운 승선수속을 마치고, 마침내 3층 우리 방으로 다시 들어왔어요. 낯익은 우리물건들과 여행용 가방이 눈에 들어 왔어요.

” 아, 딸들이 겉옷을 전부 배에 두고 나갔네, 밖에 비가 많이 와서 추운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어요. 방을 대충 정리하고 가방 안에서 양복바지와 드레스를 구겨지지 않게 옷장에 걸어 놓으려고 가방을 정리하다가 당신이 쓴 글 3장을 발견했어요. 얼마나 날 원망했을까?   라는 선입감을 가지고 글을 폈어요.

당 신이 내게 쓴 글을 읽으며 나의 존재를 깊이 고맙게 느껴준 남편의 마음을 발견하니, 감동했고, 정신 없이 첩첩이 일 처리를 여기까지 해오느라, 흘리지도 못했던 눈물이 눈가에그제서야 주르르 흘러 내렸어요.  아!  이런 날도 오는구나. 내 마음도 같았는데…… 너무나 힘들었던 지난 하루. 그러나 한 10년 동안 살면서나 경험할 감정의 우여곡절(Ups and downs)을 압축해서 경험한 시간들 이었어요. 남편을 만나면 좀 안아달라고 하고 싶었지요.

아침에 일어나서 로션(Lotion) 하나만을 바르고 마이애미의 거리를 쏘다니느라 지쳤고, 얼굴모습도 엉망이니 식구들이 방에 돌아 오기 전에 샤워를 하고, 화장도하고, 머리를 말리고, 근사 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둔갑을 하고, 이제 식구들을 만나 기뻐할 상상만 하면 되는 순간들이었어요. 아- 아! 그것도 참 잊지 못할 행복한 순간 이었어요.

배가 꽤나 허기져서 11층 식당으로 가서 샐러드를 먹으며, 식구들이 바하마 관광 후 배로 들어오는 것이 혹시 보일까 봐, 연신 배 아래 입구를 내려보곤 했지요.   음식을 다 먹고 식당에서 나오다가 당신과 마주친 거 예요. 한번보고, 믿지 못하는 듯, 다시 보고 놀라는 남편, 결혼한 이후로 아마 나를 저렇게 귀하고 반갑게 쳐다본 것은 그때가 처음 이었던 것 같았어요. 어안이 벙벙해 하고, 통쾌해하고, 반가워 하고, 사랑스러워 하는 모습으로 나를 포옹해 주었지요……. ”

아내는 나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고 난 성공담이나 듣듯이 흐뭇해 하며 들었다.
아 내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결국 해피엔딩(Happy Ending)을 향해, 서로가 서로의 행동과 활동을 모르면서, 일이 착착 진행된 것 같았다. 나는 아내 없는 상황에서 가족여행을 힘들게 이끌고 있었고, 아내는 마이애미에서 여러 가지 난관을 돌파하며 바하마까지 온 것이다. 각자 당한 고통은, 재회의 큰 기쁨을 맛보기 위한 과정 이었던 것이다.

영주권 갱신을 못한 것은 아내의 불찰(Carelessness)이고 가족여행의 제반 준비를 책임진 사람으로 점검미비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내가 대견스러웠다. 마이애미에서 헤어져야 된 운명을 본인의 의지와 노력 그리고 일 처리의 순발력과 집중력으로 운명을 바꾸는 의지적 활동을 보여준 것이다. 운명(Lot)을 숙명(Fate)으로 체념적으로 받아 들이지 않고 건설적인 의지적 활동으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아내는 나의 점수를 딴것이다. 이것은 한편의 영화 같았다.

도대체 이 영화의 각본은 누가 썼고 또한 감독은 누구란 말인가?  주연(Leading star)은 누구고 조연(Supporting player)은 누구고 엑스트라(Extra)는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중요한 것은 주연이 아내(Grace) 인지 아니면 남편(David Shin) 인지가 궁금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영화 출연료는 누구에게 받는단 말인가?

아! ……  던져진 존재로서, 얄궂게 재미나며, 고통과 기쁨이 함께 엮어져(Woven) 있는 우리의 삶이여!   우리는 역사를 이끌어 가고 있는 건가?   오히려 역사의 산물이 우리인가?

 

신석호

882 total views, 1 views 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