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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박종혁<br /><br />
사진 박종혁

나이 마흔에 주부에서 한복디자이너가 됐다.’ 이영희를 소개하는 프로필은 이렇게 시작된다.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한복디자이너가 되어 본인의 인생까지 디자인한 그가 여성 혁신가 시리즈 두 번째 주인공이다. 

한복디자이너 이영희는 한복으로 틀을 깬 인물이다. 요즘이야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스타일이 됐지만, 저고리가 없는 한복은 20년 전 그녀가 한국이 아닌 파리에서 처음으로 시도했던 스타일이다. 그것은 ‘바람의 옷’이라는 이름을 달게 됐다. 한복디자이너로서는 전에 없는 파격이었다.

20년 전의 ‘바람의 옷’처럼, 한복디자이너 이영희의 삶은 ‘혁신’이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1993년 한국 디자이너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참가했고, 이후 파리 거리에 부티크도 열어서 파리에서 가장 예쁜 가게로 뽑히기도 했다.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패션쇼를 열었고 2004년에는 맨해튼에 한복 박물관을 개관했다. 한복으로는 최초로 파리의 오트 쿠튀르 무대에 오르기도 했으며 구글에서 선정한 세계 60인의 아티스트에 선정되어 있기도 하다. 아트 프로젝트에서 선보이는 작가들의 작품 이미지에 그녀의 한복이 있다. 전 세계 어디서나 클릭 몇 번으로 그녀의 한복 화보와 이영희 박물관 소장 유물들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한복의 틀을 깬, 파리로 간 한복쟁이
‘무엇을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 늦은 마음만 있을 뿐.’ 이영희가 즐겨 쓰는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시작한 한복디자이너의 삶은 그녀의 천직이었다. 여든이 된 지금까지 한복을 매만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늦은 나이는 없지만, 마흔이 무엇을 시작하기에 쉬운 나이는 아니죠.
요즘에는 나이 마흔이 늦은 나이가 아니지만, 제가 시작할 때는 그런 말이 많았어요. 어떤 목표를 가지고 한복을 시작한 건 아니에요.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니까 꿈이 계속 생기더라고요. 파리의 쇼도, 뉴욕의 박물관도,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까 도전정신이 생기고 목표가 생기더라고요. 늦는다는 것은 없어요. ‘나 같은 사람이 하겠나’ 이런 생각도 그렇고요. 정말 절실하면 안 되는 게 없어요. 정신적인 초능력이라는 게 있어요.

1993년 파리 프레타포르테 무대는 잊을 수 없죠. 한복이 ‘바람의 옷’이 되었어요. 어떻게 보면 그게 첫 한류가 아닌가 싶어요.
그때 한복 저고리를 벗기고 치마로만 연출해서 무대를 준비했어요. 그걸 보고 파리 기자가 ‘바람의 옷’이라는 표현을 써줬어요. 한복 치마가 날리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표현한 거죠. 그 말이 너무 좋은 거예요. 한국에서는 한복을 이상하게 만들어놓았다고 비난하던 사람들도 많았는데 덕분에 시각이 많이 달라졌어요. 파리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니까 저도 행복했지요. 제가 쇼에 대한 욕심이 있었어요. 도전을 해보고 싶었어요.

당시의 사진은 2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아요. 한복의 매력을 정말 제대로 끄집어내신 것 같습니다.
한복은 아름다운 옷이에요. 사람들이 잘 몰라주지만 정말 많은 매력이 있는 세련된 옷이에요. 패션에서 소외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에 한국에서는 구식이라는 이미지가 컸는데, 파리 사람들은 ‘바람의 옷’이라고 알아줬잖아요.

그래서 파리에 부티크도 여셨잖아요. 현지 반응이 대단했다고 들었어요.
샹젤리제 근처에 작은 숍을 열었는데 정말 인기가 많았어요. 장사도 잘되고. 파리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줬어요. 파리에서 제일 예쁜 가게로 꼽힐 정도로 유명세가 있었어요. 저는 한복의 매력을 잘 알아주니까 너무 고맙고 신이 났죠.

 
이후에도 굵직한 쇼를 많이 하셨어요. 뉴욕에는 박물관까지 세우시고.
한복이 이렇게 아름다운 옷인데, 그걸 작품으로 많이 알리고 싶었어요. 파리에서 쇼를 하니까 뉴욕에서도 하고 싶더라고요. 카네기홀에서 쇼를 하고, 인연이 닿아 뉴욕 맨해튼 32가에 이영희 박물관을 세웠어요. 파리와 뉴욕은 사람들의 성향이 다르긴 하지만, 관심을 많이 가져줬어요. 

쇼를 사랑하시는 것도 선생님이 다른 분들과 다른 점인 것 같아요.
저는 쇼가 너무 좋아요. 파리에 쇼 하러 갈 때 집을 두 채 팔았죠.(웃음) 뉴욕 박물관을 설립할 때 집 한 채를 팔았어요. 돈을 많이 모으지 못했어요. 노년을 대비해야 하는데 제가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어요. 그런데 나는 돈보다 쇼를 하는 것이 좋아요. 쇼를 할 때 살아 있는 것 같거든요. 디자이너로서도 그렇고 인간으로서도 그렇고. 저는 죽기 전에도 쇼를 하는 것이 소원이에요. 그게 존재의 이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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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박종혁<br /><br />

 

한복디자이너 인생 40주년
올 가을에는 뉴욕에 있는 이영희 박물관이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공원으로 이전을 한다. 세계 엑스포가 열리는 것을 기념해 추진하는 프로젝트로, 이영희 작품의 모든 것은 물론 전통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까지 마련된 새로운 장소가 탄생할 예정이다. 내년은 그녀가 한복디자이너로서 살아온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4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한복디자이너로 살았네요. 구상하고 계신 프로젝트가 있으시죠?
경주 박물관이 제일 큰 프로젝트예요. 한복을 위한 아카데미도 만들고, 여러 가지 의미 있는 공간이 될 것 같아요. 디자인은 물론 컬러, 문화까지 다양한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방향을 세웠어요. 후계자 양성의 개념도 있고, 전통문화를 끌어올리려는 마음도 있어요. 제가 대학 강단에 15년 정도 서다가 지금은 쉬고 있는데요, 내년에는 이곳에서 창의력이 더해진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기념 쇼도 하셔야죠. 굉장한 의미가 있는 자리인데요.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어요. 장소부터 콘셉트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하고 있어요. 단순히 제 작품을 보여주는 쇼는 해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지인분들도 초대해서 자리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쇼의 마법사이시니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경주 박물관 오픈 관련 아이디어도 많으시죠? 
3D로 작품을 볼 수 있는 작업도 하고 있어요. 요즘에는 기술이 좋아져서, 작품이 리얼하게 다 표현이 되더라고요. 옷자락도 날리고 머리카락도 날리고 하면서 작업하고 있어요. 눈이 내리거나 바람이 불 때, 그것만 봐도 너무 좋잖아요. 한복이 너무 아름답게 표현이 돼요.

선생님 한복은 색감이 남다른 것 같아요. 톤 다운된 컬러는 세련미의 극치입니다.
사람들이 한복 하면 떠올리는 색이 빨강, 노랑의 알록달록한 색동인데, 예전에는 한복 색이 그렇지 않았어요. 자연염색을 했잖아요. 색이 진하지 않고 톤이 낮았어요. 저는 한복 시작하자마자 색동을 못 하게 한 사람이에요. 내 눈에는 예쁘지가 않더라고요. 덕분에 ‘이영희 한복은 색이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들었죠.

가장 좋아하는 색이 회색이라고요?
네. 어떤 색과도 잘 맞는 색이 회색이에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는데, 예전에는 회색은 스님 색이라고 해서 입지도 않았어요.(웃음) 나중에는 교복처럼 (대중화가) 됐지만요.

선생님께서 한평생을 바친 한복이에요. 매력이 무엇인가요?
한복은 예술품이에요. 아름답잖아요. 한복을 입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 우리 같은 사람이 죽고 없어지면 한복이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도 들어요. 중국에서 수입을 하는 지경이니까. 어떻게 하면 문화를 살릴까, 요즘은 그런 고민을 많이 해요.

한복이 더 사랑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얼마 전에 어떤 분이 20년 된 한복을 들고 오셨어요. 결혼할 때 맞춘 한복인데 아껴 입었는데도 손상이 됐다고요. 그런데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하면 될까 하시는데, 한복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너무 예쁘잖아요. 제가 다 손을 봐드렸어요. 비싸서 못 할 것 같다고 하시는데, 그냥 해드렸어요. 이런 것 같아요. 한번 매력을 알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어린아이들이 한복을 즐길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건 어떨까 싶어요. 작년에는 아이들과 함께 다문화 어린이 패션쇼를 열기도 했는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볼 방법은 없을지 늘 고민을 해요. 어린 시절 한복을 입고 자란 아이들은 한복이 불편해서 입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고, 한복을 자랑하게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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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박종혁<br /><br />

 

이영희의 여자들
패션디자이너로 오랜 시간 일해왔지만, 그녀는 여든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건강하고 곱다. 평생 자기관리를 잘 해온 결과이며, 항상 깨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가 생각하는 프로페셔널한 여성의 기준이기도 하다. 이런 의식은 이영희의 여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이영희의 연관 검색어에 올라와 있는 여자, 디자이너의 삶을 살고 있는 딸 이정우와 손자며느리 전지현이다.

선생님은 나이 의식을 안 하시죠?
작년까지는 안 했는데 금년부터는 해요.(웃음) 사람들이 부쩍 “선생님, 건강 조심하시고 오래 사셔야 합니다” 하면서 덕담을 하더라고요. ‘내가 몇 살인데 사람들이 이러지?’ 하니까 팔십이더라고요.(웃음) 예전에는 팔십이면 죽는데, 아프면 큰일 나겠구나 싶더라고요.(웃음)

보기에는 50대 후반으로 보여요. 피부도 너무 고우시고. 비결 공유 좀 해주세요.
화장을 해서 그래요.(웃음) 늙은 태가 나죠. 염색도 했고. 비결은 운동과 정신력이에요. 운동은 하루도 안 빠지고 평생 똑같이 해요. 오늘은 수영하고 왔어요. 30분 정도.

선생님이 생각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요?
결국 마음이에요. 마음이 아름다우면 그게 겉으로 표가 나요. 마음을 놓으면 적이 없어져요. 나이가 드니까 그런 게 보여요.

따님인 디자이너 이정우 선생 이야기 좀 해볼까요. 선생님처럼 역시 혁신적인 삶을 사셨죠. 엄마의 기질을 물려받았을까요?
그럴 수 있겠죠. 약대 나왔는데, 패션디자이너가 됐어요. 저와 파리에서도 늘 함께했고요. 공부를 잘했고 친구들도 다 그런 편인데, 덕분에 친구들 사이에서는 걔가 튀는 존재예요.(웃음) 공장에 일이 있어서 잠깐 부탁을 했는데, “엄마 나 이거 할래” 하더라고요. 본인 브랜드 하다가 지금은 쉬고 있어요. 발레 공연 의상 작업도 하면서 지내고 있지요. 경주 박물관 생기면 딸이 해줬으면 좋겠는데.(웃음)

손자며느리인 전지현 씨는 어때요?
잘하죠. “할머니” 하면서. 살갑게 굴어주고. 전지현은 예쁘고 마음이 깊어요. 머리가 너무 좋고. 성격이 털털하고 그래요. 너무 잘해요, 남편한테. 영어와 요리만 해요. 미국 영화 했잖아요. 공부는 두 개만 해요. 그리고 책을 많이 읽게 하지요.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가 됐잖아요. 그러니 이제 모든 걸 다 갖춘 진짜 최고의 배우를 만들자고 했어요. 영어를 잘해서 걱정이 없어요. 

결혼하고 나서 더 잘되는 것 같아요. 선생님 댁에 기운이 좋은가요.
그러게요. 그런 이야기 들으면 좋아요. 부부가 합이 잘 맞나 봐요. 한쪽만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시어머니랑 사이도 좋아요. 서로 촬영하면서 문자도 보내고, 의상 이야기도 나누고 제일 좋은 사이인 것 같아요.

선생님의 여자들을 짚어보니, 어머니가 계시더라고요.
어머니가 훌륭해요. 제가 영향을 많이 받은 분이죠. 한복을 하게 된 계기도 어렸을 때 본 어머니에게서 큰 영향을 받기도 했고요. 혁신적인 기질을 물려주신 것도 결국 어머니네요.

그녀는 요즘 한복에 대한 열정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올해도 다섯 번의 쇼를 해야 한다.

“6월에 유엔 관련 국제회의가 열리는데 기념쇼를 준비하고 있어요. 가을엔 인천에서 아시안게임이 있고, 순천에서도 쇼가 하나 있어요. 슬로바키아에도 가야 하는데, 그 지역에 한류가 불었대요. 우리 모델을 데리고 가서 쇼를 하려고요. 몸을 아끼고 있어요. 기를 모아놓았다가 일할 때 터뜨려야죠. 일을 시작하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혹시 다리라도 삐끗하면 안 되니까.”(웃음)

메종 드 이영희. 압구정동 골목길에 위치한 한복디자이너 이영희의 집(부티크)은 수시로 변하는 도심의 풍경들 속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트렌디한 동네에서 한복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영희의 집은 튼튼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이영희의 한복 역시 그런 튼튼함과 세련됨을 갖추고 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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