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밥’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빵’이라는 말도 좋아한다. 빵은 서구적 이미지가 있는 말이라 한국인인 내게 어울리는 말이 아닐 수 있으나 지금과 같은 글로벌시대에 빵은 밥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나는 빵을 아주 좋아한다. 빵 중에서도 곰보빵을 좋아하는데, 이 빵을 좋아하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다.
고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무전여행을 할 때였다. 울산 방어진해수욕장에서 하룻밤 자고 나자 배가 고팠다. 어디 뭘 얻어먹을 데가 없나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단체로 여름휴가를 온 어느 회사 직원들끼리 빵 봉지를 나누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너도 하나 먹어라” 하고 줄까 싶어 얼른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무도 주는 이가 없었다. 나도 한 봉지 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때 누가 빵 봉지를 뜯다가 빵 한 개를 툭 떨어뜨렸다. 얼른 내가 집어 들었다. 모래가 잔뜩 묻어 있는 빵이었지만 모래를 터는 둥 마는 둥 하고 맛있게 먹었다. 그게 바로 곰보빵이다.
빵 이야기를 하니까 한 청년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생각하고 돈 한 푼 없이 서울을 떠났다. 걷거나 어렵게 버스를 얻어 타거나 하면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배가 고프면 남의 일을 거들어주고 얻어먹었다. 그렇게 한 달째 되던 날, 사흘을 굶은 끝에 배가 너무 고파 그만 어느 시골 가게에 들어가 빵을 훔쳤다. 혹시 주인이 쫓아올까 봐 냅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어느 지점에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훔쳐온 빵을 먹으려고 하자 그게 빵이 아니라 분말세제였다. 그때 그는 얼마나 놀라고 슬펐는지 눈물이 다 났다고 한다. 그날 이후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은 없었으나 그날의 슬픔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빵엔 ‘고통’이라는 재료 꼭 필요
나는 청년의 이야기에 가슴 깊이 아픔이 느껴졌다. 빵이라는 말에는 인생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데 그 의미가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 주인공 장발장도 배고픔 끝에 훔친 빵 하나 때문에 인생이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물, 밀가루, 이스트, 설탕, 소금, 계란 등의 재료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의 내일이라는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재료들 중에서도 고통이라는 재료가 꼭 필요하다. 누구든 고통 없이는 내일이라는 빵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고통은 불행이라는 이름으로 누구에게나 시도 때도 없이 닥쳐온다. 이것이 삶의 본질이다. 운명과 죽음이 삶의 일부이듯 고통도 반드시 거쳐야 할 삶의 한 과정이다. 그래서 누구나 고통을 감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내가 고통을 겪을 만한 가치조차 없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라고 했다. 인간 존재의 가치가 바로 고통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평창도 실패라는 고통의 재료가 들어갔기 때문에 겨울올림픽 유치 성공이라는 맛있는 빵을 굽게 되었다. 미래의 나라 곳간을 비워버릴 수 있는 정치 포퓰리스트들의 온갖 주장에는 내일이라는 빵을 굽기 위한 오늘의 고통이 도외시돼 있다. 고통과 인내의 재료 없이는 어떤 국가의 국민도 맛있는 빵을 구을 수 없다.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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