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한 집배원
2011.02. 24.
전남 해남에 집이 가난해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머슴인 아버지를 따라 나무를 해오고 풀을 베는 일로 가난한 살림을 도왔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학교에 다니고 싶어졌다. 소년은 어릴 때부터 엄마와 같이 다니던 교회에 가서 학교에 가게 해 달라고 며칠씩 기도하다가 하나님께 편지 한 장을 썼다.
‘하나님 전상서’ 편지 교회에 배달
“하나님, 저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굶어도 좋고 머슴살이를 해도 좋습니다. 제게 공부할 길을 열어주세요.”
소년은 공부에 대한 자신의 열망과 가난한 집안 형편을 적었다. 편지봉투 앞면엔 ‘하나님 전상서’라고 쓰고 뒷면엔 자기 이름을 써서 우체통에 넣었다.
소년의 편지를 발견한 집배원은 어디다 편지를 배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심 끝에 ‘하나님 전상서라고 했으니 교회에 갖다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해남읍내 교회 이준목 목사에게 전해주었다. 함석헌 선생의
제자인 이 목사는 당시 농촌 계몽운동에 앞장선 분으로 소년의 편지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소년을 불러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살게 하고 과수원 일을 돕게 하면서 중학교에 보내주었다.
소년은 열심히 공부해서 한신대에 진학했다. 졸업 후엔 고향에서 목회자로 일하다가 스위스 바젤대로 유학을 가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엔 총장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 소년이 바로 오영석 전 한신대 총장이다.
오 총장의 이 일화에서 내가 주목한 분은 진학의 길을 열어준 이 목사가 아니라 무명의 집배원이다. 수신인이 ‘하나님’인 편지를 교회에 전해준 집배원이 오늘의 오 총장을 있게 했다고 생각된다. 만일 집배원이 “뭐 이런 편지가 다 있어. 장난을 쳐도 유분수지” 하고 편지를 내동댕이쳐 버렸다면 소년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내 소년 시절에도 그런 역할을 하신 분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국어시간의 일이다. 당시 교과서에 실린 김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을 배울 때였다. 집에 가서 시를 한 편씩 써오라고 숙제를 내신 김진태 국어 선생님께서 숙제 검사를 하면서 마침 나를 지목해서 써온 시를 읽어보라고 하셨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난생처음 써본 시 ‘자갈밭에서’를 낭독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 집은 왜 가난한지, 엄마는 왜 나를 가끔 미워하는지’ 하는 소년의 마음을 담은 시였다.
내가 시집을 들고 선생님을 찾아뵌 것은 마흔이 넘어서였다. 엎드려 절을 올리고 나서 그때 선생님의 그 칭찬이 저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고 기억하시지 못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아니라 다른 학생이었다 하더라도 선생님께서는 그런 칭찬을 하셨을 것이다. 선생님은 교사로서 칭찬의 역할에 늘 충실하셨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지만 지금도 내 머리 위엔 선생님 손의 칭찬의 온기가 늘 느껴진다. 중학생이 처음 써본 시에 대한 칭찬은 훗날 소년이 시인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각자 주어진 삶의 역할이 있다. 그 역할의 충실성과 성실성에 의해 다른 사람의 삶이 변화되고 발전돼 나간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생활 18년 동안 수백 권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저술활동을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게 된 것은 처음에 동문 밖 주막집 주모가 선생에게 방 한 칸을 내어준 그 배려의 역할 때문이다.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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