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병원에선 하루도 사람이 안 태어나는 날이 없고, 하루도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는 날이 없다. 그중의 하나가 내 아들이었다고 해서 그게 어쨌단 말인가.” 박완서 작가의 장편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에 나오는 말이다. 그의 소설에서는 하나도 예외가 없다고 할 정도로 죽음이 등장한다.

무수한 죽음 이야기를 통해 그는 “그것이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일부임을, 삶으로부터 동떨어진 게 아니라 삶의 한 양상임을 보여준다.”(평론가 김치수) 삶의 일부인 죽음은 그러나 삶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농담>의 한 구절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비슷하게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제각기 다르게 죽는다. 착하게 살았다고 편하게 죽는 것도, 남한테 못할 노릇만 하며 살았다고 험하게 죽는 것도 아니다.”

실제 삶에서도 박완서는 여러 죽음을 맛봤다. 이십대 때 오빠의 죽음은 마흔 살의 데뷔작 <나목>을 쓴 계기가 되었고, 오십대 후반에는 남편과 아들을 잇달아 잃는 아픔도 겪었다. 악하게 산 것도 아닌데 왜 하늘은 하나뿐인 아들마저 앗아갔을까. 그때의 비통은 가톨릭문우회 문집(1989)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저승으로부터의 편지’라는 글이다.

“작년에 아들을 앞세웠다. …이렇게 괴로운데도 정신이 돌거나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게 이상하고 때때로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아들 생일이 돌아오자 그는 부산의 어느 수녀원으로 떠난다. 작년에 한 열흘 가슴을 쥐어뜯으며 하늘을 원망했던 곳이다. 그곳을 다시 찾으니 이번에는 아들이 원망스럽다. “영혼이 있다면 무슨 방법으로든지 이 애통하는 에미에게 한 번만이라도 나타날 것이지, 어쩜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단 말인가!”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미사 종소리에 깨어보니 문득 방안에 라일락 향기가 가득하다. 그때 비로소 그는 깨닫는다. 온 누리에 가득한 봄 향기야말로 “저승으로부터 온 내 아들의 편지”라는 것을. 앞으로 아들의 편지를 자주 받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애통에 겸손해야겠다”는 것을.

박완서 작가의 홀연한 부음에 많은 이들이 애통해 하고 있다. 생전에 작품에서 무수한 죽음을 이야기했던 그가 이제는 자신의 죽음을 들려주고 있다. 이별 없는 세상은 없고, 흔해서 익숙해진 슬픔도 없다. 하늘에서 보내온 편지인가. 마침 눈이 내려 나목마다 하얀 옷을 입었다. 문득 보니, 아주 오래된 새 옷이다.

-김태관 :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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