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대-
오늘은 23일 처서다.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는 절기다. 처서라 할 때의 처(處)자는 장소를 뜻하는 곳(所)이나 산다는 의미의 살(居)처가 아니고, 멈추다. 그치다(止)는 의미의 ‘처’자이다. 그러니 처서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더위(暑)가 그친다는 의미인 것이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옛말이 있다. 어디 모기뿐이랴. 파리나 그 밖의 각종 벌레들의 극성도 수그러들 것이다. 한 여름철엔 특히 야외에서는 그늘을 찾아 깊은 숲 속에도 마음 놓고 들어가기가 어렵다. 각종 해충들 때문이다. 나이든 어른들은 덜한데, 피부가 곱고 보드라운 유아나 여성들은 피해가 훨씬 심하다. 같이 앉아있어도 나 같은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는데 이들은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왕왕 있다.
요즘 들어서는 파리를 비롯해서 각종 곤충들의 피해로부터는 비교적 안전한 편이다. 그런데 아직도 모기란 놈은 정말 처치가 쉽지 않은 성가신 존재다.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nuisance)’가 어디 모기뿐이랴. 영어에도 “Mosquitoes are a nuisance.”라는 말이 있다. 금년 여름 모기 피해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기피해로부터 완전 자유롭지가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요즘이야 어디를 가나 방충망 시설이 워낙 잘 돼 있다 보니 한결 안심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사람이 살다 보면 늘 실내에서만 머무를 수는 없다. 가끔은 등산도 가야 하고 바캉스다 피서다 해서 멀리 산으로 들로 나갈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늘 안전한 보호망 속에서만 갇혀 생활할 수는 없다. 이런 때 입게 되는 가장 흔한 피해가 바로 모기로부터의 피해가 아닌가 한다.
지하철을 타고 가거나 시내 거리를 걸어갈 때면 짧은 옷차림을 한 사람들 특히 아가씨들의 갯밭무 같은 희고 미끈한 팔 다리가 자연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는 간혹 고운 피부에 빨간 반점이 한두 군데 있는 게 띄는 일도 종종 있다. 딱하고 보기에도 애처롭다. 그야말로 옥에 티다. 그것들은 십중팔구 모기가 공격을 한 자국이다. 드물게 멀쩡하게 보존이 잘 된 고운 다리를 볼 때면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어떻게 저렇게 완벽하게 모기 공격을 차단할 수가 있었던가.
이번 여름만 해도 필자와 집사람은 벌써 수 차례 모기 공격을 받은 바 있다. 물론 나야 그래도 좀 덜했는데 아내는 보기 민망할 정도의 공격 자국을 팔과 다리에 달고서 다녀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은 여자나 어린 아이들과 함께 있게 되면 모기공격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다. 남자들, 특히 나이든 노인네들의 피부는 모기가 공격하기에도 쉽지가 않은가 보다. 흡혈을 좋아하는 모기마저도 싫어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으니 이 세상에 나를 반기고 좋아해줄 사람을 어디에서 찾을까.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알 바 없으나 모기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나면 나는 우선 ‘억울하다’, ‘분하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그래서 슬그머니 화가 치민다. 어떤 땐 밤중에 그런 공격 당한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한데 그런 경우는 자다 말고 당장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잠은 어느 샌가 저 멀리 달아나고 없다. 등이란 등은 다 밝히고 모기 체포작전에 돌입한다. 어쩌다 새빨간 피로 배가 터질 듯한 놈을 발견할 때면 그 순간 복수심에 불탄다. 요런 놈은 당장 능지처참(陵遲處斬) 감이다. 내 소중한 생명의 피를 저렇게도 무참히 빨아가다니!
그래서 모기 약을 찾아 온 구석구석을 샅샅이 뿌리고 창문을 닫는 둥 한바탕 야단법석을 떤다. 그러나 끝내 그 모기란 놈은 결코 잡히지가 않는다. 나를 놀리느라 요리조리 숨바꼭질을 잘도 한다. 놀리는 솜씨가 얄밉다 못해 유연하고 여유만만이다. 모기와의 전쟁을 벌이다 보니 문득 옛날 교양영어책에서 읽었던 “A Fellow Traveller”라는 수필이 생각난다. 영국의 문인 Alfred G. Gardiner(1865-1946)의 글이다.
한 여름 밤 교외 행 막차의 열차간에서 혼자 남게 되자, “나 여기 있어”하며 웽! 하고 신문을 펼쳐 든 작가의 손등에 내려 앉는 오만방자하고 겁 없는 모기 이야기다. 녀석에게 사형선고는 내렸으나 집행이 되지 않더라는 이야기다. 모기는 사람에게 쉽게 잡히지가 않는다. 그는 한낱 미물(微物)에 지나지 않으나 대단한 존재다. 천둥 속에서도 웽하는 그 소리가 100m 떨어진 암컷에게까지 전달이 된단다. 그래서 응용과학인 생물전자공학(bionics)에서는 모기를 대상으로 레이다(radar)의 원리를 연구 했다 하지 않던가. 이래도 모기를 미물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겠는가.
모기는 2.500여종이나 된다고 한다. 말라리아나 뇌염 등의 무서운 병을 옮기기 때문에 여름철 공중위생상 요 경계 대상 1호다. 유아들에게는 아주 위험한 해충이다. 요즘은 이상기온 탓으로 여름이 지나고 나서도 모기가 극성을 부리는 때가 있다고 한다. 처서가 지나도 입이 비뚤어지지가 않을 만큼의 면역력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슨 특단의 조치는 어디서 찾을까? 그래도 서늘한 처서의 힘을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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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23
林谷齋/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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