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심심치않게 신문이나 기타 매체를 통해 한국 사람들의 독서량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많이 적다는 말을 듣습니다. ‘일 년에 몇 권’ 하는 식으로 평균 숫자를 비교해가면서 한국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그리고 종종 자신은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하면서 역시 “일주일에 몇 권”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분들도 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저는 혼자 생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과연 그 ‘몇 권’ 이라는 숫자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책읽기와 관련하여 우리가 자주 듣는 옛 말 중에는 두보의 시에서 나온 “남아필독오거서(男兒必讀五車書)”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보의 시대이니 ‘남아’라고 말했겠지만 굳이 성별에 구애받지 않으시길 빕니다. 당시의 책은 종이 책이 아니라 죽간이었기 때문에, 혹은 책의 크기가 컸기 때문에 수레 한 대에 실리는 책의 양이 적었다는 따위의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만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때 이 말을 인용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여담입니다만 고등학교 시절 제 친구 중에는 그 때 벌써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읽었다고 말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무협지라면 자다가도 일어날 친구였었지요. 그 친구의 가방 속에는 늘 무협지 한 질 정도가 들어 있었고 무협지니 그랬겠지만 한 권을 읽는데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비록 고등학생이었지만 이미 그 정도 분량의 책을 읽을 수 있었겠지요.(물론 모든 무협지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두보의 남아필독오거서라는 말과 함께 삼국지 위지(三國志 魏志)에서 나온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이 있고 사마천의 사기에서 나온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같은 책을 백 번 반복해서 읽다보면 뜻이 자연히 나타날 것이라 말과 책을 매고 있는 가죽 줄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책을 읽었다는 이러한 말들은 한 권의 책이라도 뜻을 이해할 때 까지 여러 번 읽어야한다는 말로 해석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부단한 노력과 꾸준한 책읽기를 강조할 때 이 말을 사용하시더군요.

그런데 한 사람이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각각 백 번씩 반복해서, 책을 맨 가죽이 세 번 끊어질 때까지 읽을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그런 일은 어려운 일이니 어느 정도 적당한 선에서 두 가지 책읽기 방법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것이 현실적인 책읽기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는지는 차이가 있겠지요. 여러분께서는 어떤 방법에 더 치중하십니까?

직업 때문에 많은 책을 보아야 하는 저로서는 일 년이면 몇 수레 분량의 책을 다룹니다. 하지만 목차를 통해 책의 전체 내용을 대강 살피고 서평을 몇 편 읽은 후에 그 책에 대한 구입 결정을 내리는 저의 일상적인 업무를 두고 책읽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일 때문에 그렇게 많은 책을 다루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서 읽는 책은 참 천천히 읽습니다. 그리고 정말 마음에 드는 책은 몇 번씩 되풀이해서 읽습니다. 지금 제 책상에는 한 꺼번에 읽는 것이 아까워 두어달째 하루에 한 두 페이지만 읽고 있는 책도 있습니다. 읽지 않은 페이지가 매일 매일 줄어드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런 책을 읽으며 저는 저자가 말한 의도를 이리 저리 돌려 생각해 보기도 하고 저 자신이 경험한 일들과 연관을 지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같은 내용의 구절이라고 하더라도 오늘 읽을 때와 내일 읽을 때 서로 다른 느낌을 받고 또 그 때 마다 다른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한 해에 읽는 책의 실제 권수는 다른 분들에게 밝히기 부끄러울 정도로 적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들이 말하는 그 평균 ‘몇 권’에 모자라게 책을 읽었다고 해서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읽은 책에 대해서 100%는 아니더라도 그 중 대부분을 제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 것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작가의 의도를 모두 이해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책을 읽으며 저는 그 책의 내용을 제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저에게 필요한 것을 찾습니다. 그러다보니 책을 읽으며 제가 느낀 것들과 제 머리 속을 지나간 수 많은 생각들이 늘 머리 속에 남아 책을 읽지 않을 때도 책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글의 시작에서 이야기한 일 년에 ‘몇 권’ 이라는 숫자는 어쩌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달에 서 너권의 책을 읽었지만 그 속에서 한 권의 분량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 한 사람과 한 달에 한 권 밖에 읽지 않았지만 그 한 권의 모든 것을 흡수한 사람 중 누가 제대로 된 책 읽기를 했는지 그리고 누가 더 “많이” 읽었는지는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숫자를 사랑합니다. 쉽고 간단하게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숫자 사랑이 책읽기와 연결이 되어서 나타난 것이 ‘다독왕’이니 ‘독서왕’이니 하는 행사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에서 더 나아가 최근에는 학생들의 책읽기를 장려하기 위해 독서 인증제를 실시하고 있는 지역들도 있다고 합니다. 지정된 책을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험을 치르거나 독후감과 같은 독서한 흔적을 가지고 점수를 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런 독서인증제를 통해 부여한 점수를 대학입시전형에 도입하려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으니 학생들에게 확실하게 책을 읽히는 방법이기는 하겠습니다. 하지만 짧은 블로그의 글을 한 편 읽어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고 그 속에서 얻어가는 것이 다른데 책읽기가 과연 그렇게 점수로 간단히 환산될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책읽기를 그렇게 강제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학교에서 혹은 교육청에서 지정해준 책만을 읽고 그것을 토대로 시험을 친다는 계획 그 자체는 이미 아이들에게 책읽기를 가까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책읽기를 멀리하게 만들 요소를 다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책을 강제적으로 읽고 그 내용에 대해 시험을 치러야 함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획일적인 사고의 위험은 차지하고라도  인증을 받기 위해 아이들은 단지 숫자채우기에 급급한 책읽기를 하게 될 수 있고 또 더나아가 명작 요약본으로 시험에 나올 내용 만을 읽는 현상이 나타날 우려가 있습니다. 대학에서 실시하고 있는 독서인증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에게 그렇게 강요하는 책읽기는 오히려 그 학생들이 대학만 졸업하면 지긋지긋한 책과는 영원히 멀어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물론 책을 읽지 않는 학생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강제적으로 읽히려는 마음은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그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숫자에 치중한 방법은 결코 좋은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방법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연스럽고 무엇보다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다양한 책들을 도서관에 비치하고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이 관심있는 분야의 책을 선택하게 하거나 그런 책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학교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책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가르쳐 주는 것도 학교의 일입니다. 그렇게 아이가 자라면서 읽은 책들을 살펴보면 이 아이의 관심은 무엇이고 장차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는 평생을 가지고 갈 재산, 즉 책을 제대로 읽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혀서 교양을 쌓고 생각을 깊게 만들겠다는 발상은 좋습니다만 동시에 아이들이 책읽기를 사랑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일부 대학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이기는 합니다만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책읽기를 강요하는 것은 어쩌면 이미 늦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대학에 들어오기 이 전에 아이들에게 책과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합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가져오는 폐단을 굳이 지적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각 급 학교에 도서관이라는 시설을 만들어놓고도 학생들의 시험 공부 장소로 이용하거나 제대로 관리할 인력조차 배치하지 않은 것이 우리 학교의 현실입니다. 더구나 아이들에게 강제적으로라도 책을 읽혀야한다면서 독서인증제도와 같은 것을 만들지만 정작 아이들이 어떻게 책을 읽고 책에서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런 내용을 제대로 지도할 수 있는 사서 교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 교육 당국의 태도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아이들이 책과 가까워지기는 커녕 책이란 따분하고 지긋지긋한 존재로 여기기 십상입니다. 결국 책읽기 역시 입시를 위한 하나의 과목으로 전락하고 입시만 끝이 나면 혹은 학교만 졸업하면 책과는 영영 멀어지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다시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정책을 결정하게되면 역시 악순환이 반복될 뿐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듣습니다. 일 년이면 수백권의 책을 읽는 그들을 보면서 보통 사람들은 주눅이 들지요. 그리고 그 사람들만큼 많은 책을 읽지 않는,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읽을 수 없는 자신을 돌아보고 부끄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전문가들의 책읽기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의 책읽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보통 사람들의 책읽기는 읽는 책의 양이 아니라 읽기의 질에 치중하는 책 읽기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비록 많은 양의 책을 읽지는 못 하지만 한 두 권이라도 제대로 읽고 또 규칙적으로 매일 읽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처럼 집에서 늘 책을 가까이 하는 어른들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이라면 굳이 학교에서 강요하지 않아도 책을 읽습니다. 이 말은 학교에서 선생님들이라도 아이들에게 책읽는 모습을 보이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신다면 강제로 시행하는 독서 인증제 몇 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말입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 혹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 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여러 권의 책을 읽는다는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의미는 바로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인데 이는 책에 인쇄된 내용을 머리 속에 단지 암기만 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즉, 책에 인쇄된 내용을 이해하고 그 다음에는 자신의 머리로 그 내용을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고 소화시켜서 최종적으로 자신의 머리와 마음 속에 그 내용을 담고 자신의 경험과 연결지을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머리와 마음 속에서 나와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 이것이 제대로 된 책읽기라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떤 책은 맛만 보면 되고 또 어떤 책은 꿀꺽 삼켜야 하지만  또 다른 일부의 책들은 꼭꼭 씹어서 소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Some books are to be tasted, others to be swallowed, and some few to be chewed and digested…”) 제가 말하는 제대로 읽는 책읽기는 바로 꼭꼭 씹어서 소화시키는 책읽기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비록 일 년에 몇 권의 책 밖에 읽지 못하더라도 수 백권의 책을 읽는 사람 못지 않게 책읽기를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이라면 일 주일에 인문 사회 과학 서적을 서너편 읽지 않아도 충분히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미니 홈피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지적 수준을 갖출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도 쉬지 않고 꾸준히 그리고 내 머리로 생각하면서 책을 “많이” 읽는 일입니다. <가져온 글>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들은 Google LIFE Archive 에서 가져온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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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6. 2010.

林谷齋/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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