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문예수필은 <무엇에 관해서 진술하지 않고>, <무엇을 보여주는> 문학입니다. “장미꽃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은 에세이 문학입니다. 그러나 창작은 진술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직접 장미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재미 있다는 것입니다. 장미꽃에 관해서 말하는 것보다 직접 장미꽃을 보여 준다면 얼마나 더 재미 있겠습니까?
지금 이곳 부천에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어제도 하얗게 눈이 내렸는데 오늘도 아침부터 흰 눈이 펄펄 날리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내 방의 이중 창문의 내 창을 열어 놓고 외창의 투명 유리를 통해서 창밖에 펄펄 날리는 눈발을 내다보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방금 위에서 말 한 것은 ‘지금 이곳 부천에는 흰 눈에 내리고 있다’는 진술이었습니다. 즉 에세이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선생님에게 지금 저 창밖에 내리고 있는 눈을 직접 보여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재미 있겠습니까? 현실에서는 물론 그 같은 일은 불가능 합니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가능 합니다. 그러니 창작문학이란 얼마나 재미 있는 일이겠습니까?
창작은 또 쉽기도 합니다. 특별히 그 동안 에세이(수필)를 써 온 우리들에게 창작문예수필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두 가지만 바꾸면 일단 ‘창작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수필계에 시급히 필요한 일은 일단 창작권내에 발을 들여 놓는 일입니다. 지금 당장에 우수한 창작품은 찾는 일은 그야말로 우물에서 숭늉을 달라는 것과 같은 성급함이라 할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당장에 할 수 있는 두 가지란 첫째는 작품 속에서 ‘나’, 즉 작가가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수필(에세이)를 쓸 때 항상 ‘나’는–, 이라고 작가가 직접 말을 하였습니다. 에세이는 그렇게 쓰는 것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에세이문장은 항상 주관적 시점의 문장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은 객관적 시점의 문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쉽고도 또 재미도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즉 작가는 작품 속에서 빠져 나오고 화자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인칭 ‘나’가 주인공이 된 소설 작법과 꼭 같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소설은 허구이고 수필은 허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방법은 같은 과에 속한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이 사실만 해도 얼마나 재미 있는 실험이겠습니까?
두 번째 할 일은 말하는 방법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에세이를 쓸 때는 “장미꽃은 사랑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은 ‘장미꽃은 사랑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사랑이란 장미꽃 <같은 것>이다”라고 말을 하는데 그것을 진술하지 않고 장미꽃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의사 전달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은 <같은 것>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창작문예수필이 장미꽃에 관해서 말하지 않고 직접 장미꽃을 보여준다는 뜻이 바로 이 ‘같은 것’이라는 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것’이란 말 할 것도 없이 직유입니다. 그러나 말을 할 때는 직유이던 것을 문학 창작에 끌어 들여와 창작물을 만들게 되면 창작물을 만드는 그 과정을 통해서 직유가 은유로 변하게 됩니다. 즉 완성된 창작문예수필 작품은 <사랑>이라는 제목 밑에 장미꽃 그림 한 장이 그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장미꽃은 사랑이다’가 되거나 ‘사랑은 장미꽃이다’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이란 것은 여기 이 그림의 장미꽃 같은 것이다’라는 설명도 하지 않지요. 그렇게 느끼고 해석하는 몫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즉 창작문예수필은 넓은 의미의 비유(은유로 해석해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만)를 창작하는 것입니다. 작가가 쓰려는 것이 사랑이 되었든 미움이 되었든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혹은 미움이란 저런 것이다 라고 설명하지 않고 사랑을 <상징할 수 있는> 어떤 <비유>를 그려내는 것으로 설명과 진술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이관희
<창작문예수필이론서>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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