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얼마간 자신을 피해자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해서, 오랜 세월 일방적인 폭력에 시달리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 경우 ‘폭력’에 대처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릅니다. 오늘 사연 속의 아내 역시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아를 보호하며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이제 와서 그 방식의 옳고 그름에 관하여 따지는 것은 이중의 폭력일 뿐이라는 아내. 한편 과거에 붙들려 마음이 뒤틀린 아내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는 남편. 이제라도 배우자의 자리를 되찾고 싶다는 오늘의 손님에게 여러분의 생각을 더해주세요.

아내의 비밀 수첩 가해자는 잊어도 피해자는 못 잊어

올해로 50대에 첫발을 들이는 중년 남성입니다. 저희는 두 살 차이 부부로 두 아이를 키우며 20년을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의견차이가 생기네요. 저는 평범하다고 생각한 결혼생활이지만, 아내는 한 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고생길이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남들만큼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랐으니 그만하면 성공적인 결혼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내는, 시어머니의 간섭과 노여움, 그리고 터무니없는 기대와 요구 때문에 한순간도 활개를 펴고 행복해본 적이 없었답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저희 어머님, 보통 까다롭고 괄괄하신 게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이시다, 배려가 없으시다는 불평도 저는 다 인정합니다. 제 누님조차도 어머님과의 관계를 힘들어하니까요. 그런 분의 며느리로 사는 게 쉽지는 않았겠지요. 하지만 제가 이해 못 하는 부분은 아내의 기막힌 이중성입니다 

남들은 고부간의 전쟁에 새우등 터지게 생겼다고 하는데, 저는 아내에게서 그런 심각한 불평을 들은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자주 두통을 호소하고, 점점 말수나 웃음이 줄기는 해도 다 나이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다른 여자들은 시집을 기피한다는데, 제 아내는 할 도리를 자청해서 다 해왔습니다. 외며느리라 누구한테 떠넘기고 미룰 데도 없습니다. 매주 어머님을 집으로 모시거나, 시댁을 찾아뵙는 것에도 저항이 없었고, 명절이나 생신 때, 제사 때에 혼자 일하면서도 군말이 없었습니다.  어머님이야 원래 성격이 그러시니, 이것저것 잔소리도 하시고 듣고 있기 민망하게 야단도 치셨지만, 아내는 언제나 말없이 잘 넘어가더군요. 아내가 워낙 무던하고 또 어머니와 특별히 궁합이 맞아서 그럭저럭 잘 지내는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러다 얼마 전에 제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그간 어머님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기록해두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기록 속의 어머니는 말 그대로 나쁜 시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저는 무책임한 방관자에 불과하고요.  저는 전혀 몰랐던 일들이 그 동안 정말 많았더군요. 제 짐작을 뛰어넘는 내용들도 충격이었지만 이런 걸 기록하고 있었다는 자체가 더 충격이었습니다 

이게 뭐냐고 했더니, 처음엔 당황하던 아내가 곧 당당하게 밝히더군요. 비밀 수첩이랍니다. 그 세월을 참고 견디자면 그거라도 해야 했답니다. 나는 당신이 고부갈등으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는 줄은 몰랐었다, 왜 진작 얘기 안 했느냐고 했더니, 바로 그 점이 원망스럽답니다.  사람이 말라 들어가는데 어떻게 모르는 척하고 있느냐고요. 모든 게 내 불찰이라고 치고, 그래도 우리가 화합해서 살아가려면 나쁜 기억은 잊어야 하니, 이런 건 이제 더 갖고 있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거부하더군요. 자기한테는 보물 1호 같은 거랍니다. 

그래, 그런 걸 들여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으냐고 화를 냈더니, 자기는 속이 다 시원하답니다. 어머님한테도 한 번 보여드리고 싶을 지경이랍니다. 그때부터 아내의 입에서 쏟아져나온 온갖 얘기들…… 아내의 입을 통해 듣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들로서도 할 말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되어가지고 듣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머니 입장에서 이해를 해보자고 얘기를 시작하면, 아내는 더욱 화를 냅니다. 모든 게 어머님 탓이라고 답을 정해 놓고 무슨 대화를 더 하자는 것인지…… 

어머님이 이제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습니까? 예전에 비해 기운이 많이 빠지셨습니다.  아내가 분을 못 삭이며 얘기하는 사건들도 다 몇 년 전 사건들입니다. 요즘엔 아들 며느리 눈치도 보시고 그러다보니 배려 비슷한 것도 하십니다. 늙어서 힘빠지는 노모가 저한테는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데, 아내는 그런 동정심이 전혀 안 생기는 모양입니다. 호랑이 같으시던 시절에도 웃으며 견뎌와 놓고 이제 와서 진저리를 칩니다. 기억력도 어찌나 좋은지 십 년 전 주고 받은 대화도 토씨 하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찌됐든 과거의 일은 잊고 행복한 앞날로 나가자고 하니 아내는 제게 ‘폭력’이라고 맞섭니다. 가해자는 잊어도 피해자는 못 잊는답니다. 그리고 누구도 나한테 정식으로 사죄한 적이 없답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부모한테 사죄를 받나요. 못난 부모 틀린 부모도 부모인 것을…. 그러나 아내는 말합니다. 나는 그 분의 친딸이 아니기에, 그런 마음으로 넘어가지지가 않는다고요. 다들 잊고 웃을 때도 자기는 다 기억하고 있겠답니다.

한편 이해하면서도 아내가 무섭습니다. 저렇게까지 용서를 못 하면 진작에 이혼을 요구하든지, 시집과 연을 끊었어야 하지 않나요? 다 견뎌내면서 속으로는 하나도 삭히지 못하고 있는 아내…. 마음이 저 지경이면 몸에 병이 들 것 같습니다.  속도 모르고 점점 더 약해져서 며느리에게 기대오는 제 어머니는 또 어떻게 봅니까?  어머니와 아내, 제 자신을 위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다시 또 모르는 척 넘어가면 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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