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城’이라 불리는 호텔, 그 찬란함 뒤에 숨은 상처를 잊지 않는…
- 엘마우(독일)=어수웅 기자
입력 : 2014.02.27 04:00
유난히 포근했던 올겨울을 아쉬워하며, 독일 알프스의 만년설을 마지막 겨울 특집으로 마련합니다. 단순한 여행을 넘어 인문학적 성찰을 꿈꾸는 ‘유럽 인문 여행+’ 시리즈의 첫 회이기도 합니다. 어수웅 주말매거진 팀장과 인문향 나는 여행서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홍익출판사)을 쓴 문학평론가 정여울씨가 독일의 엘마우, 스위스 루가노,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를 다녀왔습니다. 3월 첫 주 주말매거진은 남도의 봄 식도락 기행으로 문을 엽니다. 기대해 주시기를.




독일 슐로스 엘마우에는 사실상 4월까지 봄과 겨울의 구분이 없다. 백설 같은 알프스의 만년설과 연둣빛 잔디가 함께 하는 곳. 육체의 휴양과 영혼의 고양이 그 안에 있다. 사진=Schloss Elmau
최고의 호텔 그리고 최악의 악덕(惡德)
독일 남부의 휴양 호텔 엘마우 성(Schloss Elmau)에 주목한 이유는, 단순히 이 호텔이 내년 독일에서 열리는 G8 정상회담 장소로 결정됐다거나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세계 휴양지 1001’에 포함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독일 총리 메르켈의 선정 이유에 더 끌렸다. 독일 나치 정권의 과오를 반성하는 의미의 선택이라는 것. 1914년 문을 연 이 호텔의 설립자 요하네스 뮐러(Muller·1864~1949)는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이지만, 그의 손자이자 현 소유주인 디트리히 뮐러 엘마우(59)는 할아버지의 행동을 속죄하고 있다고 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휴양 호텔과 역대 최악 수준의 악덕(惡德)과의 만남, 그리고 그 반성이라니.
뮌헨에서 남쪽으로 100㎞ 떨어진 엘마우 성에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이 호텔 지하차고에 넘쳐나는 신형 BMW나 랜드로버로 아우토반을 달려 도착할 수도 있고, (기자 일행처럼) 뮌헨에서 3명 합계 33유로(약 4만9000원)에 불과한 기차표를 이용해 1시간 45분 만에 도착할 수도 있다. 이 호텔을 즐기는 비용 역시 극과 극의 선택이 가능하다.
귀 어두운 노인 역장 한 명뿐인 간이역 클라이스(Klais)에서 내려 호텔에 전화를 걸었다. 예약 없이 도착한 참이었다. 호텔의 미니 셔틀버스는 10분 만에 도착했고, 꼭 그 시간이 지나 엘마우 성에 도착했다. 그 10분 동안 수직으로 깎아내린 듯한 독일 알프스의 암벽이 사위에 등장했고, 수정처럼 맑은 호수가 지나갔으며, 순백(純白)의 눈의 나라가 시야를 채웠다. 호텔의 공식 명칭은 엘마우 성 럭셔리 스파 & 문화의 은둔처(Luxury spa & Cultural hideaway). 말 그대로 육체의 휴양과 영혼의 고양이 목표다.
다시 역사로 돌아간다. 1914년. 철학자이자 개신교 신학자였던 창립자 요하네스 뮐러는 “인생의 짐에 부담을 느끼는 건강한 사람들을 위한 치유의 공간”을 내세우며 호텔을 세웠다. 당연하게도 악덕이 목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철학은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거부. “집단은 개인에 우선한다”를 전면에 내세웠던 히틀러에게 자연스럽게 빠져든 까닭이다. 그 이후 나치의 악행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 흥미롭게도 엘마우의 잔혹사는 집안에서 쫓겨난 손자로부터 구원받는다.
현 소유주인 디트리히의 호텔 인수 역사는 차라리 한 편의 드라마. 독일 유력지 슈피겔은 이 호텔 등을 소재로 독일 최상위 1% 부자의 쾌락과 공포를 살핀 적이 있다. 타락한 선대(先代)를 경멸하며 가출했던 디트리히는 젊은 시절 이혼과 빚더미의 대명사였다. 한 달 1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세 아이를 키우던 시절이 몇 년간 지속됐지만 우여곡절 끝에 개발한 호텔 경영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성공과 기업 상장으로 역전 홈런을 날렸다. 이후에는 호텔을 내놓지 않으려는 친척들과 대립과 송사. 끝까지 거부하던 삼촌은 2005년 8월의 대화재를 겪으며 무너졌고, 이후 디트리히는 엘마우 성을 재건한다.
호텔 휴양을 즐기러 가서 뭐 그리 복잡하고 골치 아픈 역사까지 알아야 하느냐고? 물론 당신의 선택이다. 엘마우에서는 하루걸러 콘서트와 문학 낭독회, 석학의 강연이 이어진다. 그것도 독일 남부 민속음악 밴드 따위가 아니라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나 철학자 페터 슬로터디크 같은 대가들이다. 지난 12월에는 우리나라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이 공연했다. 이 날은 러시아 문호 푸시킨에 대한 강연이 있었고, 다음 날에는 우크라이나의 정변에 대한 토론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단순히 럭셔리 스파만을 누릴 수도 있다. 육체적 휴양에 집중할지, 영혼의 고양을 위한 프로그램까지 즐길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자유니까.
육체의 휴양과 영혼의 고양을 동시에
압도당했던 이유는 규모나 화려함보다 고요함과 편안함이었다. 독일 최고의 부(富)가 넘쳐흐르는 호텔이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스타일. 한껏 드높인 천장과 그 높이에 걸맞은 통유리 창 사이로 알프스의 만년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압도적인 자연 풍광이 인간의 모든 노력을 민망하게 만든다. 그 앞에서 최고급 티크나 오크 원목의 마감재, 투스카니 스타일의 앤티크 인테리어, 명품 가구들은 겸손해질 뿐이다.
아침 7시에 옥상 야외 수영장(rooftop swimming pool)을 찾았다. 옥상이라 해봤자 겨우 2층이지만, 설악산 울산바위를 위아래로 한껏 늘린 듯한 우람한 바위산 베터슈타인(wetterstein)의 위용이 코앞에 있다. 온수 가득한 25m 풀에서 황제 수영을 만끽한다. 눈부신 만년설과 오렌지빛 일출, 그리고 투명한 새벽 물안개를 홀로 즐긴다. 평일임을 감안해도 분에 넘치는 호사. 이 호텔의 객실 수는 128개, 직원수는 220여명. 대부분의 경우는 손님보다 직원이 더 많다고 했다.
이 호텔을 즐기는 방식은 당신의 금전적 여유와 문화적 취향에 따라 다양하다. 가장 경제적인 방식은 ‘1일 2식 플러스 패키지’(half board & more)를 이용하는 것.
평일에는 싱글 룸(120유로)+패키지 이용료(1인당 93유로)+관광세(0.6유로)+2월 준성수기 추가요금(40유로)에서 시작한다. 합계 253.6유로(약 37만원). 기자가 경험한 패키지다. 5성급 호텔에 걸맞은 아침 뷔페와 저녁 정찬(미슐랭 스타 식당인 Luce d’Oro를 제외한 이 호텔의 5개 레스토랑 중 택일), 라운지에서의 애프터눈 티와 조각 케이크, 4개 스파 휴게실과 실내외 수영장, 객실 미니바, 헬스-피트니스 강습, 도서관 등을 모두 별도의 추가 요금 없이 이용할 수 있다.
그 자체로도 작은 비용은 아니지만, 이 호텔과 레스토랑의 우아함을 생각하면 헐값 수준이다. 저녁으로 선택한 레스토랑 빈터가르텐(Wintergarten)의 6코스 스테이크 정찬은 그것만으로도 패키지 전체 이용료(93유로)를 훌쩍 뛰어넘는 맛과 품격을 지녔다.
여행 수첩

호텔 엘마우 성 : +49-8823-180. www.schloss-elmau.de 방값은 최저 120유로 싱글룸에서 455유로 아파트까지 다양하다. 주말 혹은 성수기, 아이 동반 여부 등에 따라 다양한 추가 요금이 붙는다. (1유로=1470원 기준)
가는 방법 : 독일 뮌헨서 아우토반 A95를 타고 남쪽으로 1시간 30분쯤 걸린다. 뮌헨에서 한 시간마다 기차가 있다. 클라이스역(Klais)에서 내린다. 호텔 무료 셔틀버스로 10분 거리. 독일철도청(www.bahn.de)에서 카드 예매 가능하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편도 1인당 19유로부터.
즐길거리 : 문학 주간, 재즈 페스티벌, 낭독회, 무용 워크숍, 정치 토론 등 1년 행사만 100개를 넘는다. 작은 행사는 무료, 유명 인사의 공연과 강연도 20유로 수준이다.
인근 여행지 :루트비히 2세의 사냥용 별장까지 3시간 코스의 하이킹 트레일이 있다. 그는 동화 속 세상을 꿈꾸던 19세기 독일 남부의 ‘미치광이 군주’. 디즈니와 히틀러로부터 동시에 존경받았다. 아쉽게도 이 하이킹 코스는 2월까지는 눈 때문에 폐쇄됐다. 대신 독일의 알프스라 불리는 소도시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가파)이 있다. 뮌헨에서 기차로 1시간 30분, 호텔이 있는 클라이스에서 15분 거리다. 약 30분 간격. 역시 독일철도청(www.bahn .de)에서 예매 가능.
먹을 곳 :가파에서의 식당은 도시 한복판에 있는 레스토랑 알펜호프(Alpenhof)를 추천한다. 로컬 맥주인 HB 밀 맥주 500mL 4유로, 독일 남부 특유의 흰 소시지와 프레즐을 더한 바이스부르스트(Weisswurst) 메뉴는 6.90유로. 매력적인 가격과 맛이다. www.restaurant-alpenhof.de
독일 남부 특유의 흰 소시지(바이스브루스트·weisswurst)를 달콤 쌉싸름한 독일 겨자에 찍는다. 흑맥주인 에딩거 둔켈 500mL 유리잔으로 투명한 햇살이 내려앉는 2월 하순의 목요일.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 저 위로, 미하엘 엔데 거리(Michael Ende Strasse)라고 쓴 표지판이 보인다. 이곳은 인구 2만6000명에 불과한 초미니 도시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 kirchen·이하 가파·GaPa). 엘마우 성에서 기차로 15분을 달려 도착한 독일의 알프스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지만, 1936년 제4회 동계올림픽이 열린 도시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가파)의 동화 같은 거리. 가파(독일)=이승원 / 미하엘 옌데의 전시장
독일에서 가장 높은 산의 이름은 추크슈피체(Zugspitze). 백두산보다 대략 200m 높은 2962m다. 가파를 찾는 상당수는 그 산을 오르기 위해서지만, 이 작은 소도시에는 또 하나의 보석이 있다.
40개 언어로 2500만부가 팔려 나갔고, 우리나라 독자에게도 익숙한 베스트셀러 ‘모모’의 작가 미하엘 엔데(1929~1995). 가파는 작가의 고향이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는 것은 물론, 도시 한복판에 그의 공원과 미술관이 있다.
이 도시에서 처음 들렀던 가파 관광안내소(Tourist Information)의 상냥한 직원 글로리아는 “엔데 공원은 가파의 오아시스”라고 귀띔했다. 20m 훌쩍 넘는 높이의 피나무(lime tree)를 지나자 미술관 건물이 반겼다. 흥미롭게도 시 당국은 이 미술관을 쿠어하우스(Kurhaus)라고 명명했다. 우리말로 하면 요양소. 엔데와 그의 작품을 통해 병든 현대인의 육체와 영혼을 치유하라는 의미일까.
엔데가 자신의 대표작이 된 동화 ‘모모’를 발표한 게 1973년이다. ‘모모’의 부제는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 능력을 지닌 말라깽이 소녀 모모는 마을 사람들에게 기쁨과 용기를 주는 존재다. 하지만 도시의 악당인 ‘회색 일당’은 마을 사람들의 시간을 절약해준다는 미명 아래 그들의 시간을 야금야금 빼앗는다.

모모에게 찾아올 시간도, 서로 흉금을 터놓을 시간도, 상상을 펼칠 시간도 빼앗긴 마을 사람들이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는 명약관화. 어떨까. 40년 전의 낡은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여름이면 수련(睡蓮)으로 가득하다는 공원 연못 주변을 걸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되새김한다. ‘가파에서의 한철’이 시간의 노예가 되어버린 현대인을 구원할 수 있을까. 가파 중앙역에서 도시 정중앙 미하엘 엔데 공원까지는 걸어서 10분. 한 집 걸러 중세 프레스코 벽화가 반기고, 동화같은 아기자기함이 남아 있는 곳. 고요를 즐기며 이 작은 도시의 골목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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