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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엄마의 병원 약속이 되어 모시고 갔더니 의사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운을 뗀 후 내게 종이를 건네는 것이었다.  무어냐고 물어보니 엄마에게 혹시 돌발적인 사건이 생기더라도 미리 준비하는 마음으로 작성해두는 문서라며 보증인 두 명의 사인과 함께 대리인 서명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 대리인이란 나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 위임장에는 이런 글이 써있었다. ‘as my health care agent to make any and all health care decisions for me, except to the extent that I state otherwise,  My agent does know my wishes regarding artificial nutrition and hydration.  This proxy shall take effect only when and if I become unable to make my own health care decisions.   내가 다른 방법으로 진술한 것을 제외하고, 나의 모든 건강 관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강관리 대리인으로 지정합니다.  나의 대리인은 내 인위적 영양과 수분공급에 대한 내 결정과 희망사항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이 위임장은 내가 나 자신의 건강 관리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되었을 때 효력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망이 가까울 때 인위적으로 생명연장이나 영양공급을 원하는지 아니면 장기나 조직세포를 기증하기 원하는지 또는 연구를 위해 기증하길 원하는지 여러 가지 질문이 뒤따른다.   이 질문엔 대답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엄마에게 느닷없이 여쭈어보기도 힘들어 두 달이 지나도 사인만 받아 놓은 채 병원에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 만으로 90세가 되시는 엄마 얼굴이 자꾸 어른거린다.

새해 엄마께 대접해드린다며 오빠와 한국식당에서 만나기로 한 날 일 년에 한 두 번 만날까 말까 하는 엄마의 하나 밖에 없는 며느리가 함께 나왔다.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오빠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조심스럽게 건강관리 위임장을 내밀었다.  깜짝 놀라다가 금방 엄마에 대한 연민 어린 표정으로 그늘지는 오빠에게 그냥 미리 준비하는 의미라고 말끝을 흐려가며 두 명의 증인이 필요하니 뒷장에 사인하라고 했다.

얼른 집어 들어 오빠가 사인하려고 하자 옆에 앉았던 며느리가 왜 동생이 사인하면 됐지 당신이 사인하냐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앞에 앉아있던 내가 나는 대리인이라 증인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해주었지만 한 구석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엄마가 알게 되실까 봐 오빠에게 눈짓하며 얼른 감추라고 했다.  엄마는 귀찮다며 보청기를 하고 나오시지 않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둘 밖에 없는 아들과 딸이 함께 있다는 사실에 엄마는 여전히 행복해 하시는 표정이셨다.

물론 며느리가 딸만 못해서 그럴 것이라고 마음 다스리며 참아왔는데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긴급상황이 될 때를 위해 작성하는 서류에 아들이 사인하는 것마저도 옆에서 일일이 간섭하는 게  얄미웠다.  평소 오빠가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를 하더라도 이기고야 마는 성격이라 어쩌랴.  참고 살아 온 오빠를 봐서라도 내가 참아야지.  참 사람은 자신이 자라온 환경을 뛰어넘기란 힘든가 보다.  자랄 때 받았던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이 어른아이가 되어 나타남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나도 완전하지 못해 흠 많고 부족한 것이 많지 않은가?.  그냥 덮어주고 이해하고 기도해주어야지.

그날 먹은 것은 점심 스페셜이라 저녁 식사에 비해 가격도 저렴했건만 아들이 위임장에 사인하는 사이에 며느리는 핸드백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영수증을 보며 점심값 낸 것을 적고 있는 모습이 몹시 거슬렸다.  몇 푼이 된다고 매달 대접해드리는 것도 아니고 일 년에 한 두 번이면서 우리들 앞에서 보란 듯이 쓴 돈을 적고 있다니…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 한 발자국 비껴서 생각해보고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아무리 아끼고 아낀다고 해도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을 위해 쓰고 또 써도 모자라지 않고 오히려 남을 통해서라도 넘침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젠 속을 좀 너그럽게 써도 될 나이인데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런 불평을 늘어놓기는 생전 처음인 것 같다.  나도 늙는 가보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그리고 남을 비난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에 의거하여 많이 자제해왔으나 이런 것은 나의 솔직한 감정표현이지 남을 헐뜯으려는 목적은 아니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싶다.   이젠 나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싶다.  짙은 화장이나 가면 쓴 모습으로 살기엔 인생은 너무나 고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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